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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명대사⑪] 윤여정에게 ‘뼈명언’ 듣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입력 2021.07.07 13:51 수정 2021.07.07 13:57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주인집 할머니(윤여정 분)와 찬실(강말금 분). 마치 모녀 같다 ⓒ이하 찬란 제공

예술영화 감독 지명수의 프로듀서로 오래 일해 온 이찬실. 그에겐 어떤 복이 많을까.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감독 김초희, 제작 지이프로덕션·윤스코퍼레이션, 배급 찬란, 2019)가 시작되고 한참이 지나도 찬실(강말금 분)에게 닥치는 현실은 고되기만 하다. ‘뒷산에 살리라’의 무사 촬영을 기원하는 고사를 지내고, 감독과 프로듀서와 스태프와 배우들이 모여 술 마시기 게임을 즐기던 도중 감독이 급성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만다.


배우 소피(윤승아 분): 감독님 우리 잠깐만 쉬었다 가요, 진짜 죽을 것 같은데.

찬실: 감독님 그만 해요, 오늘만 살다 죽을 거예요?

감독: 음, 우리 중에서 마음씨가 제일 예쁠 것 같은 사람은? (좌중이 찬실을 지목한다)

찬실: 일 많이 시켜 먹으려고 별짓을 다 해요, 내 모를 줄 아나.

선배 여자 배우(이영진 분): 우리 중에 제일 바람을 가장 많이 피웠을 것 같은 사람은? 하나, 둘, 셋!

손가락 세례를 받은 감독이 심장을 움켜쥐고 쓰러진다.

찬실: 여러분, 쇼하시는 거예요. 금방 일어나실 거예요. 쇼하시는 거예….


달 아래 첫 동네, 달동네로의 이사 ⓒ

쇼가 아니었다. 지명수 감독이 죽은 사건은 이찬실 프로듀서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든다. 언제나 그러느냐고? 특수성이 있다. 영화 ‘집시의 시간’을 보고 영화 일을 꿈꿨던 찬실은 예술을 위해, 예술 하는 감독을 위해 연애도 결혼도 잊고 일에만 매달리다 나이 사십이 됐다. “어쩜 이렇게 살림을 잘하느냐”며 찬실을 일컬어 “한국영화의 보배, 한보”라고 말하던 제작사 박 대표(최화정 분)는 지 감독이 죽자 얼굴을 바꾼다. 지명수의 영화는 “지 감독의, 지 감독에 의한 영화였다”며 애초 프로듀서는 누구여도 됐고 없어도 됐던 것이니 다른 감독 작품의 프로듀서로 찬실을 기용할 생각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다양한 장르, 상업영화를 해 본 적도 없기에 죽은 건 감독인데 찬실도 업계에서 사장된다.


당장 먹고살기가 어려워진 찬실은 스태프 후배들의 도움 속에 짐보따리를 이고 지고 산동네 집에 세 든다.


“주인집 할매, 으스스하지 않습니까?”

“집이 반지하도 아니고 사각형도 아니고”


분위기를 바꾸려는 찬실, “근데 여기 공기는 진짜 좋다, 볼래?”.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데 소피가 말한다.


“이런 산 공기를 쐬고도 다시 못 일어나면 언니 사람도 아니야.”


소피(윤승아 분)의 불어 선생님 김영(배유람 분)을 향해 '직진'하는 찬실 ⓒ

찬실 씨는 재기할 수 있을까. 무슨 힘으로 일어서게 될까. 목구멍이 포도청인 찬실은 소피네 가사도우미 일을 시작한다. 잣 막걸리도 빚으러 다니고 기타도 배우고 폴 댄스도 배우러 다니는 소피는 불어를 배운다, 집에서. 연기는 못해도 세상사에는 찬실보다 야무진 소피가 말한다.


소피: 이렇게 힘들 때는 연애라도 해야 세월이 빨리빨리 가지.

찬실: 와(왜) 그리 일만 하고 살았을고!


맞는 말이다, 신선놀음 이상으로 도끼 썩는 줄 모르는 게 연애다. 그럴 때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찬실은 소피의 불어 선생이자 단편영화 감독 김영(배유람 분)을 보고 한눈에 설렌다.


“시집은 못 가도 영화는 계속 찍고 살 줄 알았는데. 너무 갑자기 이래 되니까 도저히 힘들어서 못 버티겠어요. 천년만년 좋아하는 사람들 하고 영화만 찍고 살 줄 알았거든요. 근데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갈 거예요? 그러면 저 꼭 한 번만 안아줄 수 있어요? 근데 이름이 뭐라 그랬죠? 나 10년 만에 남자 처음 안아 봐요, 더 세게 안아주세요, 더 꼭. 아야! 아파요, 그렇게 세게 안으면 아파요.”


영화 얘기가 나오니 사뭇 프로듀서의 눈빛이 살아오는 찬실. 연애의 산통은 깨지고… ⓒ

연애 속도가 빠르다, 싶었더니 꿈이다. “미칬나, 점점 미치가는 기가”(미쳤나, 점점 미쳐가는 건가). 먹고살아야 하니 가사도우미를 하지만, 소피를 분장하러 오는 스태프의 눈을 피해 숨어 있어야 하는 신세. 왠지 마음이 끌려 나름엔 적극적으로 김영에게 다가서지만 다 죽어 버린 연애 세포에 꼰대 짓이나 하기 일쑤.


영: ‘동경 이야기’ 봤었는데, 조금 지루하더라고요. 아무 일도 안 일어나잖아요. 전 점점 더 재미있는 영화가 좋더라고요

찬실: 뭐가 아무 일도 안 일어나요. 엄마가 죽었는데, 아들도 전쟁에서 죽었고. 그게 뭐가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거예요.

영: 그런 이야기를 좀 심심하게 그리시는 것…

찬실: (말 자르며) 심심한 게 뭐 어때서요? 본래 별 게 아닌 게 제일 소중한 거예요. 오스 야스지로 감독님이 그런 걸 영화에 다 담으셨잖아요. 그 보석 같은 게 그분 영화에 다 나오잖아요. 영이 씨 눈에는 그런 게 안 보여요?

영: 보여요. 그래도 전 크리스토퍼 놀란 영화 좋아해요

찬실: 놀란? 아, 그런 영화 좋아하는구나.

영: 어렸을 때는 홍콩영화도 많이 좋아했고요.

찬실: 에, 좋지요. 홍콩영화도. 저도 어렸을 때 장국영 진짜 좋아했었어요.


우리가 사랑했던 장국영(김명민 분), 찬실에게 전하는 위로ⓒ

말하기가 무섭게 장국영(김명민 분)이 영화 ‘아비정전’ 속 러닝셔츠에 트렁크 팬티 차림으로 등장한다.


찬실: 아, 이제 내가 미쳤는갑다, 완전 돌았는갑다. 영화 하다가 연애도 못 하고 아도 못 낳고 땡전 한 푼 없이 이래 가는갑다(ㅠㅠ).


사람이 전하지 못하는 위로를 귀신이 전한다. “외로운 건 그냥 외로운 거예요, 사랑이 아니에요”. 장국영의 말로 김영에 대한 마음에 갈피가 잡힐 것 같지만, 그러면 다 성인이고 철학자다. 찬실이는 똥인지 된장인지 끝내 찍어 먹어 보고, 결국 쓰디쓴 괴로움에 빠진다. “우주의 나이에 비하면 인간의 나이 차이 같은 건 생각할 필요가 없다”며 호기롭던 찬실도 물러선다.


할머니들은 아신다, 사는 게 무엇인지… ⓒ

찬실이 일어설 힘을 주는 건 그가 귀신인지 의심했던, 비호감이라고 말했던 주인집 할머니(윤여정 분)와의 교감이고 할머니가 해주는 밥심이다. 사실 할머니에게 답이 있음을 찬실이도, 영이도 알았다.


찬실: 할머니들한테는 가슴이 너무 아파서 안 까먹고는 못 사는 그런 세월이 있는 것 같아요. 안 그러고서는 저렇게 웃을 수 있나 싶어요.

영: 우리 할머니도 저렇게 웃으시는데. 어릴 때 할머니가 저를 키워 주셨거든요. 아직 살아 계신데, 저를 못 알아보세요.

찬실: 우리 할머니는 돌아가셨어요. 글이라고는 이름 세 글자밖에 모르는 완전 촌 할매였는데도 사는 게 뭔지 다 아는 것 같았어요. 마음대로라는 게 애당초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영: 할머니들은 다 알아요, 사는 게 뭔지. 날씨가 궂은 날에도 맑은 날에도.


영화 중반까지 주인집 할머니는 가끔 등장한다. 여러 고민과 걱정에 잠 못 이루는 찬실에게 “안 추워? 얼른 들어가”라고 한 마디 툭 던지는 식이다. 그러다 쑥 들어와 묻는다.


영화 PD? 얼마나 이상한 일을 했으면 헌 사람도 몰라 ⓒ

할머니: 어디 갔다 오는 거야, 회사 갔다 오는 거야?

찬실: 아, 저 회사 안 다니는데요.

할머니: 아, 안 댕겨. 그럼 뭐 허는데(하는데).

찬실: 그냥 이것저것.

할머니: 이것저것, 그 전엔 뭐 했어?

찬실: PD요

할머니: (그게 도대체) 뭐?

찬실: 영화 만드는 PD요

할머니: 그게 뭐 허는 건데?

찬실: 돈도 관리하고 사람도 모으고 뭐 이것저것 다하는 그런 사람인데요.

할머니: 그니까 그게 뭐 허는 사람이냐고.

찬실: 에, 흐흐흐흐흐, 저도 이제 잘 모르겠어요.

할머니: 을마나(얼마나) 이상한 일을 했으면 헌 사람도 몰라. 됐어, 내가 다 알아들은 걸로 칠게.


“내가 다 알아들은 걸로 칠게”. 이 한마디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세상이 몰라 줘도 내가 알아줄게, 고생 많았네(토닥토닥). 찬실이의 복은 인생 밑바닥에서 만난 주인집 할머니였다.


윤여정이 말하면 뼛속 깊이 파고드는 명언이 된다 ⓒ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취업난 속에 결혼도 아이도 정규직도 포기하는 젊은이들의 등을 쓰다듬는 영화다. 나이와 상관없이 내일이 보이지 않는 세상의 수많은 찬실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려 애쓰는 영화다. 그리고 김초희 감독을 대신해 영화 안에 들어가 우리를 토닥이는 이는 윤여정이다.


단지 나이가 많아서, 연기를 잘해서만이 아니라 윤여정이 말하면 ‘뼛속 깊은 명언’이 되고 세상살이에 생긴 생채기에 ‘호오’ 입김을 불어주는 힘이 생긴다. 올곧게 살아왔고, 젠채하지 않고 열려 있고, 하고 싶은 말은 솔직하게 해 왔고, 재치와 지혜로 직설과 독설의 가시를 뺄 줄 아는 윤여정이기에 가능한 조언이자 위로다.


사과도 빠르고 정확하다. 이제 한글 공부하는 상황이다 보니 찬실에게 온 편지를 본인 것인 줄 알고 뜯었을 때, 편지를 가지러 온 찬실에게 말한다.


“미안해, 내 건 줄 알고 뜯었어. 미안, 미안해.”


짧은 문장 안에 ‘미안해’가 세 번. 장국영 귀신을 봤냐고 찬실에게 면박 대신 밥을 준다.


“몸이 그렇게 허해 빠져서 어디다 써먹어. 내 닭 사 왔으니 이따 와서 밥이나 먹어.”


이번엔 아예 할머니가 귀신인 건지 의구심을 품는 찬실. 인생이 허하긴 허한가 보다.


찬실: 할머니 귀신 아니죠?

할머니: 무슨 자다가 풀 뜯어 먹는 소리야. 혹시 귀신 보면 나 좀 빨리 잡아가라, 그래 줘.


나 좀 빨리 잡아가라…. 누릴 거는 다 누려 봐서 아쉬움이 없다는 의미인지, 아픔이 너무 많아서 그만 멈추고 싶다는 의미인지. 어느 쪽이든 더 이상 연연하지 않는 관조와 여유에서 삶에 대한 통달이 느껴진다. 저 정도의 평정심을 갖게 되는 게 노인이라면, 나이 더 들어볼 만하다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 늙음,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잠재우는 대목은 또 있다. 할머니가 찬실을 데리고 콩나물을 다듬으며 나누는 대화다.


할머니: 허든 일은 왜 관뒀어?

찬실: 오랫동안 같이 일하던 감독님이 돌아가셨어요.

할머니: 그래서 일을 못 하는구나.

찬실: 네, 제가 하고 싶다고 계속할 수 있는 일이 아니더라고요.

할머니: 아직 젊으니까 뭐든지 하면 되지 뭐, 난 이제 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어. 늙으니까 그거 하나는 좋다.

찬실: 진짜 하고 싶은 일이 하나도 없으세요? 그런 사람이 세상에 있어요?

할머니: 나는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아. 대신 애써서 해.

찬실: 그러면 오늘 하고 싶었던 거는 콩나물 다듬는 거였겠네요.

할머니: 훗, 알면 됐어.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산다, 대신 애써서 한다! 이보다 쉽게 풀어낸 카르페디엠(‘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의 라틴어. 호라티우스의 시 ‘오데즈’(Odes)에 나오는 구절에서 유래)이 있을까. 내일에 대한 거창한 계획보다 오늘의 실천이 중요하다. 알지만 행하기가 쉽지 않은데, ‘애써서 한다’는 말에 용기가 난다. 작은 것부터 차근히 애쓰며 사는 거다.


당신은 이 생의 주인공, 찬실을 지켜보는 돌아온 장국영 ⓒ

김초희 감독은 영화 안에 위로와 응원의 말을 곳곳에 심어 놓았다. 소피가 읽는 책의 한 구절로 먼저 중국 당나라 때의 임제선사의 글귀, 또 우리나라 시인 나태주의 시구.


수처작주(隨處作主)하니 입처개진(立處皆眞)이라.

그대들이 어디를 가나 주인공이 되니

자기가 있는 그곳이 모두 참된 곳이다. (임제선사)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그래도 더 좋은 건 할머니가 주민센터 한글교실 숙제로 쓴, 삐뚤빼뚤 글씨로 입을 오므려가며 쓴 시다.


사람도 꽃처럼

다시 돌아오면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봄이건 가을이건 처음에 피었던 그때가 되면 다시 돌아오는 꽃. 할머니는 먼저 보낸 딸이 그립고, 찬실이는 이제껏 참았던 울음을 터뜨린다. 쓰다듬든 할머니. 한바탕 눈물은 때로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새로 시작할 기운을 준다.


사람이 힘이다, 인복이 최고! ⓒ

“지금보다 훨씬 젊었을 때 저는 늘 목말랐던 것 같아요. 사랑은 몰라서 못 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만은 나를 꽉 채워줄 거라 믿었어요. 근데 잘못 생각했어요. 채워도 채워도 그런 걸로는 갈증이 가시지 않더라고요. 목이 말라서 꾸는 꿈은 행복이 아니에요. 저요, 사는 게 뭔지 진짜 궁금해졌어요. 그 안에 영화도 있어요.”


“목말라서 꾸는 꿈은 행복이 아니다” “맹세는 하지 마라, 달도 변하는데 뭔들 안 변한다고” “

먼저 가라, 내 비춰 줄게”. 어느새 할머니를 닮아 하는 말마다 명언이 된 찬실은 달을 향해 눈을 감는다.


“우리가 믿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그것은 무엇일까. ‘영화’가 아닐까. 우리가 믿고 싶지만 자꾸 흔들리고 의심하는 것, 하고 싶지만 못하고 있는 것, 보고 싶지만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찬실이가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해서 만들었을 작품이 관객 없는 극장에서 상영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관객은 없어도 “멀리 우주에서 응원”하겠다던 장국영이 기립박수를 한다. 찬실이는 복도 많다, 삶이라는 게 뭔지에 대한 자신만의 답을 담았을 영화를 완성했다. 김초희 감독 역시!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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