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난 이어 방역난 인정
북한이 일방적으로 단절한 남북 연락통신선이 정상 간 합의에 따라 복원된 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코로나19 여파로 '전쟁 못지않은 시련의 고비'를 맞았다고 밝혔다.
'외부지원을 받지 않겠다'며 자력갱생·자급자족 노선을 견지해온 김 위원장이 최근 식량난에 이어 코로나19로 인한 어려움을 공개 호소함에 따라 향후 국제사회 인도적 지원을 수용할지 주목된다.
북한 관영매체인 조선중앙통신은 28일 김 위원장이 한국전쟁 정전협정 체결일(전승절)을 맞아 전날 평양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탑 앞에서 열린 제7회 전국노병대회에 참석했다고 전했다. 북한은 한국전쟁을 '조국해방전쟁'으로, 정전협정 체결일을 '전승절'로 기념해왔다.
김 위원장은 노병대회 연설에서 "오늘 우리에게 있어 사상 초유의 세계적 보건 위기와 장기적 봉쇄로 인한 곤란과 애로는 전쟁 상황에 못지않은 시련의 고비가 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우리 혁명무력은 변화되는 그 어떤 정세나 위협에도 대처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며 "영웅적인 전투정신과 고상한 정치도덕적 풍모로 자기의 위력을 더욱 불패의 것으로 다지면서 국가방위와 사회주의 건설의 전초선들에 억척같이 서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여파로 곤궁한 처지지만, 정세 변화 및 외부 위협에 대처할 국방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다만 지난해와 달리 '핵 억제력'에 대해 언급하지 않아 수위조절에 나선 모양새다. 남북 연락통신선 복구로 사실상 '대외 유화 메시지'를 내놓은 상황을 염두에 뒀다는 평가다.
김 위원장은 이날 연설에서 선대들이 보여준 '정신'을 계승하자며 내부결속을 꾀하기도 했다.
그는 "빈터 위에 자주강국건설의 첫 삽을 박은 전승세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면서 남들이 한걸음 걸을 때 열 걸음, 백 걸음을 내달렸다"며 "사회주의 강국 건설의 여정에 지금보다 더한 역경이 닥친다 해도 우리는 절대로 멈춰 서지 않을 것이다. 전승세대의 영웅정신을 계승해 내세운 투쟁목표들을 향해 줄기차게 돌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식량지원 수용 가능성" vs "방역 때문에 어려워"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이 최근 식량난을 인정한 데 이어 코로나19로 인한 어려움을 호소한 것은 외부지원을 수용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일 수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남측을 일방적으로 무시해온 북한이 연락통신선 복구에 호응한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관측이다.
통일부 장관을 역임한 정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은 이날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북한이 국제 정치적인 원인, 말하자면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청신호가 있기 때문에 전초전으로 (연락통신선 복구에) 합의해 나온 것이냐, 아니면 내부적으로 무슨 원인이 있는 것이냐를 따져볼 때, 내부적 원인이 크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 수석부의장은 "북한 매체들의 보도를 보면 농사 걱정을 굉장히 많이 한다"며 "금년 식량 문제가 아주 심각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풀어 줄 수 있는 상대는 결국 남쪽밖에 없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식량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체제가 흔들릴 수 있다"고 밝혔다.
앞서 김 위원장은 지난달 "지난해 태풍 피해로 알곡(식량) 생산 계획이 미달한 것으로 해 현재 인민들의 식량 형편이 긴장해지고 있다"며 식량난을 인정한 바 있다. 북한 외무성도 미국의 인도적 지원이 내정간섭으로 활용될 수 있다며 코로나19와 관련한 인도적 지원이 '순수한 목적'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우회적으로 강조한 바 있기도 하다.
다만 일각에선 북한이 섣불리 외부지원을 받지 않을 거란 관측도 제기된다. 방역을 이유로 혈맹인 중국의 지원마저 수용하지 않고 있는 만큼, 당분간 '버티기'를 이어갈 수 있다는 평가다.
실제로 북한은 최근 전 세계적 델타 변이 확산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방역 고삐를 바짝 죄고 있다.
김준형 국립외교원장은 이날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북한 내부적으로 대북지원을 받을 입장이 아닌 것으로 안다"며 "확진자는 없지만 계속 위기상황이라고 얘기를 하고 있다. 방역에 구멍이 생겼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북한도 지금 이 고비를 지나가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