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자본의 매그나칩 인수 시도 사실상 무산시킨 美
中도 과거 美 기업 대규모 빅딜에 연이어 딴지 전력
자국주의 강화로 경쟁국 역량 향상에 경계심 높아져
지난해 말 차량용 반도체 공급부족 사태를 겪으면서 전 세계 각국이 반도체를 미래 국가 산업뿐만 아니라 안보의 핵심 자원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바이든 행정부가 나서서 반도체 자급론을 바탕으로 자국 중심 공급망 구축에 전력하고 있고 중국도 반도체 굴기를 내세우며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지속되고 있다. 이에 일본과 타이완, 유럽연합(EU)도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한 대규모 투자와 함께 인력양성과 세제혜택 등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산업 주도권 다툼이 점점 심화되면서 무한경쟁과 합종연횡이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이는 글로벌 반도체 시장을 3회에 걸쳐 살펴본다. [편집자 주]
반도체 기업들이 경쟁력 강화를 위해 인수합병(M&A) 등 합종연횡 시도가 활발해지면서 전 세계 각국 경쟁당국의 견제도 심화되는 분위기다.
각국이 국가 산업·안보의 핵심 자원으로 떠오른 반도체의 자급론을 내세우며 자국주의 전략을 강화하고 있는 가운데 다른 국가의 경쟁력 강화가 상대적으로 자국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작용하고 있다.
7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전 세계 각국의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효율적인 경쟁력 강화 수단으로 인수합병(M&A)을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경쟁자와 경쟁국의 합종연횡 시도를 견제하려는 움직임도 강화되는 분위기다.
여기에는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차량용 반도체 공급난 사태를 겪으면서 특정 기업이나 국가에 반도체 공급을 의존하는 것이 큰 리스크로 이어질 수 있다는 교훈을 얻은 것도 작용하는 모습이다.
반도체 패권 경쟁 나선 美·中, 경쟁당국 내세워 M&A 시도 상호 견제
이러한 견제 심리는 반도체 패권 경쟁에 나선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가장 최근의 사례는 중국계 사모펀드 와이즈로드캐피털의 미국 매그나칩반도체 인수다. 와이즈로드캐피털은 지난 3월 14억달러(약 1조6200억원)에 매그나칩반도체를 인수한다고 발표한 뒤 미국과 한국 등 경쟁당국의 심사를 진행해 왔다.
매그나칩은 지난 2004년 옛 하이닉스반도체(현 SK하이닉스)의 시스템반도체 사업이 분리돼 설립된 회사로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디스플레이용 구동 반도체(DDI)를 비롯한 IT·차량용 핵심 반도체 부품을 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 자본의 미국 반도체 기업 인수 시도로 미국 경쟁당국이 매각 불허 입장을 밝히며 무산될 처지다.
주요 외신들에 따르면 매그나칩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자료를 통해 미국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CFIUS)로부터 "매그나칩 매각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미국 국가안보상 위험성을 확인했다"는 내용의 서한을 받았다.
사실상 매각 불허 방침을 밝힌 것으로 향후 판단에 변화를 줄 요인이 거의 없어 내달 중 M&A 시도가 최종 무산될 것이라는 게 업계의 전망이다. 미국이 바이든 행정부 출범 후 반도체 자급론을 내세우며 자국 내 반도체 공급망 구축을 강조해 온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하지만 중국도 그동안 경쟁당국을 내세워 번번이 미국 기업들의 M&A 시도에 딴지를 걸어온 전력이 있다. 합병 승인 심사 강화를 명목으로 절차를 더디게 진행하는 식으로 대응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증가하는 비용에 부담을 느낀 인수자들이 스스로 M&A를 포기하게끔 했다.
중국은 지난 2018년 미국 이동통신 반도체 기업 퀄컴이 네덜란드 자동차 반도체 업체 NXP를, 이듬해인 2019년 미국 반도체 장비업체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AMAT)가 일본 반도체기업 고쿠사이일렉트릭를 M&A하려는 시도를 모두 불허하며 무산시킨 바 있다.
매그나칩 매각이 최종 무산되면 반도체 패권 경쟁을 놓고 미국과 중국, 양국간 갈등이 더욱 심화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자국주의를 바탕으로 대규모 투자와 생산시설 유치를 통한 자국 내 밸류체인(가치사슬) 구축 경쟁에 더해 시장 판도 변화나 자국 산업과 기업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대의 M&A 시도를 보다 적극적으로 무산시키려 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자국 이익 우선주의로 M&A에 민감한 반응...견제심리 높아져
비단 미국과 중국간 반도체 패권주의 경쟁이 아니더라도 반도체를 국가 주요 산업·안보의 핵심 자원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다른 주요 국가들에서도 M&A에 대한 민감도가 높아지고 있다.
각국이 반도체 자급을 위해 총력전을 펼쳐야 하는 상황에서 자국 반도체 기업의 해외 매각은 자칫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강하게 작용하면서 M&A에 대한 견제심리가 강해지고 있다.
이에 자국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거래에는 적극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하면서 합종현횡을 무산시키려는 시도가 보다 빈번해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러한 분위기 탓에 낸드업계 3위 미국 웨스턴디지털(WD)이 업계 2위 일본 키옥시아(구 도시바메모리)를 인수하려는 시도도 성사가 어려워질 수 있다.
앞서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달 25일(현지시각) 웨스턴디지털이 키옥시아를 200억달러(약 23조3000억원) 이상에 인수를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매체는 양사 간 협상이 수 주 이상 지속됐으며 이르면 이달 중순 합의에 이를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현재 키옥시아가 웨스턴디지털과의 합병이 아닌 도쿄 증시 상장을 통한 기업공개(IPO)도 함께 검토하고 있는 등 향후 변수가 남아 있지만 양사가 M&A에 합의한다고 해도 일본 정부의 반대에 부딪힐 공산이 크다.
일본 정부 입장에서는 유일하게 남은 대형 반도체 기업이 해외로 매각되면 자국 메모리반도체 경쟁력 하락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강하게 반대하며 승인을 불허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반도체업계 사상 최대 규모의 M&A으로 관심을 모으로 있는 미국 그래픽처리장치(GPU) 설계전문(팹리스·Fabless) 기업인 엔비디아의 영국 반도체 설계전문기업 ARM 인수는 영국 정부가 국가 안보를 이유로 강하게 반대하고 있는 가운데 영국과 유럽연합(EU)이 반독점 조사에 나선 상태다.
엔비디아는 지난해 9월 일본 소프트뱅크로부터 ARM을 400억달러(약 46조3000억원)에 인수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영국은 또 자국의 파운드리(Foundry·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인 NWF가 중국 자본이 100% 지분을 보유한 네덜란드 반도체 기업 넥스페리아에 매각되는 것에 대해서도 경쟁당국이 재검토에 착수했다.
업계에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비대면(언택트·Untact)의 일상화로 반도체 수요가 폭증하고 4차 산업혁명 도래로 인해 향후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이 더욱 커질 것으로 보여 주도권 확보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M&A에 대한 견제심리가 더욱 강화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반도체 패권 경쟁을 펼치고 있는) 미국과 중국이 상대국 기업이나 자본에 자국 기업이 매각되는 M&A를 승인할리 만무할 것”이라며 “반도체 자국주의 강화로 인해 기업이 M&A를 통해 경쟁력을 강화하려는 시도가 어려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반도체 패권 경쟁③]에서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