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中·日·EU 등 각국의 민감해진 반독점 승인 심사
효율적 경쟁력 강화 수단 M&A 추진에 악영향 미칠듯
각국 치열한 인수 경쟁으로 피인수 기업 몸값 상승 가능성도
지난해 말 차량용 반도체 공급부족 사태를 겪으면서 전 세계 각국이 반도체를 미래 국가 산업뿐만 아니라 안보의 핵심 자원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바이든 행정부가 나서서 반도체 자급론을 바탕으로 자국 중심 공급망 구축에 전력하고 있고 중국도 반도체 굴기를 내세우며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지속되고 있다. 이에 일본과 타이완, 유럽연합(EU)도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한 대규모 투자와 함께 인력양성과 세제혜택 등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산업 주도권 다툼이 점점 심화되면서 무한경쟁과 합종연횡이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이는 글로벌 반도체 시장을 3회에 걸쳐 살펴본다. [편집자 주]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 각국이 반도체 패권 경쟁에 나서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업체들이 보다 효율적인 경쟁력 강화 수단으로 추진하는 인수합병(M&A)에 악재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8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미국·중국·일본·유럽연합(EU) 등 주요 국가들이 반도체 업계에서 펼쳐지는 M&A 시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자국 산업 경쟁력에 불리하게 작용할 딜(Deal·거래)에 대해서는 경쟁당국을 내세워 적극적으로 반대해 무산시킬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단행된 반도체업계 사상 최대 규모(400억달러·약 46조3000억원)의 M&A으로 주목받고 있는 미국 그래픽처리장치(GPU) 설계전문(팹리스·Fabless) 기업인 엔비디아의 영국 반도체 설계전문기업 ARM 인수는 영국과 EU 경쟁당국이 강하게 반대하고 있어 무산될 처지다.
인수 가능성이 제기된 낸드플래시업계 3위 미국 웨스턴디지털(WD)의 업계 2위 일본 키옥시아(구 도시바메모리)의 M&A도 양사가 합의한다고 해도 일본의 반대로 성사가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미국과 중국은 이미 서로의 거래를 무산시키는 등 치고받는 상황이다. 중국은 지난 2018년 미국 이동통신 반도체 기업 퀄컴이 네덜란드 자동차 반도체 업체 NXP를, 이듬해인 2019년 미국 반도체 장비업체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AMAT)가 일본 반도체기업 고쿠사이일렉트릭를 M&A하려는 시도를 모두 불허하며 무산시킨 바 있다.
이에 미국도 중국 자본의 자국 기업 인수를 막아섰다. 중국계 사모펀드 와이즈로드캐피털이 지난 3월 14억달러(약 1조6200억원)에 인수한다고 발표한 매그나칩반도체 매각을 최근 국가 안보상 위험을 이유로 사실상 불허 방침을 밝힌 것이다.
이처럼 각국 경쟁당국의 반도체업계 대형 M&A 거래에 대한 민감한 대응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업체들의 M&A 추진에 악재가 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각국의 불허 리스크가 커지면서 M&A시도가 완전 봉쇄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올 초 향후 3년 내 대규모 M&A를 공언한 삼성전자로서는 이러한 각국의 민감한 대응이 달가울리 없다. M&A를 추진하더라도 철저한 반도체 자국주의 논리에 기반한 각국 경쟁당국의 반대로 무산되는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2016년 11월 미국 자동차 전장업체 하만을 80억달러(약 9조3000억원)에 인수한 뒤 사실상 대규모 M&A의 맥이 끊긴 상태인데 최근 총수인 이재용 부회장의 복귀로 대형 M&A 성사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커진 상황이다.
D램과 낸드 등 메모리반도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떨어지는 파운드리(Foundry·반도체 위탁생산)와 시스템반도체로 인해 발생하는 반도체 불균형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향후 적극적인 M&A를 추진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특히 지난 2019년 4월 발표한 '반도체 비전 2030'을 통해 오는 2030년까지 시스템반도체 1위로 올라서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M&A는 필수적이라는 분석이다. 총 171조원의 대규모 투자에서 M&A가 한 축으로 작용해야만 경쟁력 강화가 현실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SK하이닉스도 이같은 상황은 마찬가지다. 지난해 10월 90억달러(약 10조3000억원)에 인텔 낸드플래시 사업 인수를 발표한 SK하이닉스는 최종 인수 성사까지 중국 경쟁당국의 반독점 승인 심사만을 남겨두고 있다.
이번 M&A가 업계 4위(SK하이닉스)와 6위(인텔) 업체들간 이뤄지는 것이어서 경쟁당국의 승인 불허의 단골 이유는 독과점 우려에서는 벗어나 있는데다 한국 기업의 미국 기업 인수라 중국 당국이 반대할 이유가 뚜렷히 없다.
또 낸드 시장에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중국 기업이 없어 자국 산업 위협이라는 점에서도 비켜나 있고 SK하이닉스(우시·D램)와 인텔(다롄·낸드) 모두 중국에 생산 공장을 두고 있는 등 지속적인 투자를 해 왔다는 점에서 승인을 거부할 당위성이 낮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위기다.
하지만 이후에도 효율적인 경쟁력 강화를 위해 지속적으로 M&A를 추진할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각국 경쟁당국의 경계심 증대는 향후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을 전망이다.
여기에 M&A 비용이 크게 상승할 수 있다는 점도 국내 업체들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지난해 말부터 차량용 반도체 공급부족 사태를 겪으며 국가적 산업·안보 자원으로서의 반도체 중요성을 깨달은 전 세계 각국은 자급론을 내세우며 공급망 구축을 위한 M&A에 적극 나설 태세이기 때문이다.
각국 주요 기업들간 서로 인수 경쟁이 붙게 되면 대상이 되는 피인수 기업의 몸값은 자연스레 높아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
그동안 자주 매각이 거론됐던 NXP는 이미 인수금액이 크게 뛰었다는 설이 등장하는가 하면 최근 피인수 가능성 보도가 나온 낸드업계 2위 키옥시아와 파운드리 업계 4위 글로벌파운드리스(GlobalFoundries)는 기업공개(IPO) 가능성이 있어 몸값이 크게 뛸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 역할을 하는 메모리반도체로 강한 자본력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인수 비용이 천정부지로 오르게 되면 감당하기 어렵고 투입 비용대비 효과를 감안해 스스로 포기하게 될수도 있다.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 각국의 반도체 패권주의 경쟁이 심화되면 M&A 환경도 점점 녹록치 않아질 것”이라면서도 “상대적으로 메모리에 편중돼 있는 국내 업체들로서는 단기간 내 약점 보완과 효율적인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M&A를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