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유류세 인하 시행일부터 인하분 반영 요청
유류세 내릴 때 마다 정유업계가 손실분 부담해와
유가 오르면 인하 효과 희석…애꿎은 화풀이 대상 될수도
정부가 유류세 인하 카드를 꺼내들었다. 고공행진 중인 휘발유, 경유 등 연료유 가격을 잡아 물가를 안정시키겠다는 명분이다.
이에 따라 이달 12일부터 내년 4월 30일까지 6개월간 한시적으로 수송용 에너지 유류세가 20% 인하된다. 현 석유제품 시세가 12일까지 유지된다고 가정할 경우 휘발유·경유·LPG(부탄)에 붙는 유류세는 ℓ당 164원, 116원, 40원 줄어든다.
유류세는 휘발유, 경유, LPG 등에 붙는 세금이다. 휘발유와 경유에는 교통에너지환경세와 교육세, 주행세가, 자동차용 부탄에는 개별소비세와 교육세, 부가가치세 등이 부과된다.
유류세가 휘발유 가격에서 차지하는 비중은41.8%(1일 기준)이며 경유도 33.4%에 달한다. 유류세를 인하하는 만큼 최종 제품 가격도 내려간다.
이번 인하 조치로 유류비, 가스요금 등 가계 부담이 완화될 전망이다. 정부도 조 단위 세수를 포기하면서까지 '통 큰' 물가 안정 대책을 내놨다는 칭찬(?)을 기대하는 눈치다.
모두가 웃는 정책이면 좋으련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유류세 인하는 곧 정유사들의 손실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난달 말 유류세 인하 계획을 발표하며 정유사와 한국가스공사, 액화천연가스(LNG) 직수입사 등에 유류세 인하와LNG 할당관세 인하 효과가 소비자에게 즉시 전달될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했다. 사실상 인하 조치 시행 당일부터 인하분을 반영시켜 달라는 것이다.
말이 협조 요청이지 강제나 다름없다. '정부도 조 단위 세수를 포기했으니 에너지 업계도 수 백억원의 부담을 감당해야 하지 않겠나'라는 뜻으로 읽힌다.
유류세 인하 효과가 현장까지 반영되려면 일정 기간이 필요하다. 유류세는 정유사가 기름을 밖으로 내보낼 때 붙는다. 아직 판매하지 않은 제품에 부과된 세금을 정유사가 선납하고 제품이 팔리면 충당하는 구조다.
기존 제품 재고를 소진하고 새로 유통되는 기간을 감안하면 약 2주간의 기간이 소요된다. 따라서 휘발유 등 최종 제품 가격이 내려가는 시점은 유류세 인하가 시행되는 12일이 아니라 이달 말이 돼야 한다.
그럼에도 정부는 인하 조치 시행 직후부터 인하된 기름을 팔라고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손실분은 고스란히 정유사 몫이다.
이미 같은 상황에서 정유사들이 '울며 겨자 먹기'를 한 사례가 있다. 2018년 11월 유류세 인하 당시에도 정유사들은 초반 손해를 감수하고 제품 출고 당시 인하분을 곧바로 반영했다. 선납한 유류세를 환급받는 일은 없었다.
그나마 국제유가가 잡혀 유류세 인하 효과가 제대로 발휘된다면 좋겠지만, 예단하기 어려운 것도 문제다.
원유 가격이 내려가지 않고 올라가기만 하면 그만큼 유류세 인하 효과는 떨어진다. 원유 가격이 유류세 인하분 보다 상승하면 최종 제품 가격 역시 올라가게 되는 데, 이 과정에서 '유류세 인하로 득을 본 것은 정유사 뿐'이라는 원성을 듣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현재까지 천연가스 등 가격 강세로 원유 가격이 더 올라갈 것이라는 전망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산유국들의 증산 의지도 크지 않다. 이 때문에 내년 상반기 국제유가가 100달러를 넘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2008년 당시 유류세를 10% 인하했음에도 불구, 유가가 계속 오르면서 휘발유 가격이 훨씬 치솟은 바 있다. 가격이 올라갈수록 정유업계에 대한 소비자들의 원성도 커졌다.
유류세 인하 효과가 미미할 경우 정유사들은 부담은 부담대로 떠안으면서 화풀이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가뜩이나 정부의 탄소중립 정책으로 홀대를 받는 상황에서 속앓이가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정부가 유류세를 쥐락펴락하며 물가 안정에 생색을 내는 동안 정유업계는 묵묵히 손실을 부담해왔다. 국민 경제를 위한다는 이유로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감당하는 구조는 지나치다.
기업이 양보한 만큼 정부가 이를 보완해주는 장치가 필요하다. 유류세라는 제도가 업계에 불합리하다면 개편하는 것도 방법이다. 국민 생활을 위하는 만큼 기업이 제대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 역시 정부의 역할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