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코르셋’ ‘세븐틴’을 연출한 정병각 감독이 23년 만에 장편영화를 선보였다. 오랜 시간, 이력서에는 담기지 않는, 어떤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왔는지가 엿보이는 작품 ‘싸나희 순정’이다.
류근 시인의 시골살이를 엮은 동명의 스토리툰(그림 퍼엉)을 원작으로 한 ‘싸나희 순정’(제작 시네마 넝쿨·인베스트 하우스, 배급 마노엔터테인먼트)은 보는 동안 행복하고, 보고 나서도 가끔 실실 웃음이 나는 영화다. 하루는커녕 단 한 시간 행복하기가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알고 있는 당신이라면, 정병각 감독의 감성이 펼쳐놓은 순정의 세계에서 흡족할 것이다.
사나이마저 울리는 ‘싸나희 순정’은 두 사내의 얼떨결 동거가 불러오는 변화와 그 파장을 잔잔히 또 오지게 재미있게 따라간다. 두 사내는 류근 시인이라 할 ‘낭만 술꾼’ 유 씨(전석호 분, 이하 유씨, 영화에서는 마치 이름처럼 불린다), 정병각 감독의 페르소나라 할 동화작가를 꿈꾸는 ‘순수 농부’ 원보(박명훈 분)이다.
더 이상 시를 쓰기 힘들어진 시인 유씨는 무작정 기차를 탄다.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다가 우연히 발견한 도라지꽃, 무턱대고 기차에서 내려 한달음에 달려가 도라지꽃밭에 벌렁 눕는다. 정병각 감독은 영화 시작부터 작은 종 모양을 한 청보라색 도라지꽃으로 우리를 홀린다. 세상이라는 기차에서 훌쩍 뛰어내려 ‘싸나희 순정’이라는 도라지꽃 세상으로 우리를 쑥 빠져들게 한다.
도라지꽃, 색도 모양도 어여쁘지만, 그 아래는 사람을 먹이는 도라지가 있다. 세상에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살면서 다른 이에게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자신을 지탱하던 근간을 다른 이에게 내줄 수 있는 ‘도라지’ 같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불현듯, 나의 ‘지구살이’가 도라지만큼은 덕이 있으려나 생각하는 찰나, 정병각 감독은 원보를 등장시킨다. 낭만에 취해 벌렁 누운 유씨의 몸에 눌린 도라지밭, 배상해 주겠다는 유씨에게 원보는 “뭐든 다 돈으로 되는 건 아니”라고 일침을 가한다.
까칠한 사내인가 했더니, 방을 구하는 유씨를 제집으로 데려가 방을 내주고 아침이면 일어나지도 않는 손님을 위해 마당의 암탉이 나은 달걀로 프라이를 만들어 뜨끈한 밥상을 준비하는 따뜻한 총각이다. 마당에 건 거울 끝자락에 ‘우리 집거울은 울엄마의 눈, 내가 웃으면 울엄마도 웃지요’라는 근사한 자작시를 적어 놓은 예술인이기도 하다.
직업이 시인인 유씨가 늘어져 잠만 자고 깨면 술로 세월을 보내는 동안, 원보 씨는 공사다망하다. 할아버지(김명곤 분)와 사는 영균(김지환 분)이에게 자장면도 사주고, 영균이뿐 아니라 상황이 어려운 아이들을 전부 불러 한 달에 한 번씩 자장면을 사주고, 흠모해 마지않는 홍 감독(공민정 분) 팀의 축구경기가 있는 날이면 정성 들인 반찬도 바리바리 싸 들고 가고, 동네 카페 유리창에 매달려 아름다운 사장(심은진 분)은 보도 않고 어항 속 금붕어만 싱글벙글 바라보고, 예술가는 고달퍼야 한다며 논두렁에 텐트 치고 동화 습작에 여념이 없다. 원보 씨는 이 모든 일을 사나이 순정보다 진한 ‘싸나희 순정’으로 즐거이 한다. 그런 원보를 보며 유씨 마음에도 동심이 되살아오고 순정의 세계가 움튼다.
그냥 보아도 아름답고 다른 이에게 쓸모도 있고 도움 주는 사람, 원보뿐 아니라 마가리 사람들 모두가 도라지꽃 같다. 우주슈퍼를 하는 영숙(김재화 분), 영숙을 향해 ‘돌싱’ 끼리의 아름다운 결합을 제안하는 택시기사 칠교(최대철 분), 도라지꽃밭을 가꾸는 갑골할매(전성애 분)와 아들 판석(최대성 분)은 한마음으로 영균의 가족을 자청하고 마음으로 돌본다. 서울에서 내려와 빈둥거리거나 움직인다 싶으면 사고나 치는 유씨에게도 넉넉한 우정을 베푼다. 그 순정의 세계에서 유씨의 마음도 영균이도 건강하게 자란다.
글로 쓰자니 착하기만 한 교훈적 영화인가 싶지만, 결코 아니다. 도시와 다른 구수하면서도 뼈 있는 유머, 소소하지만 배꼽 잡는 소동들이 즐거움을 주고 마가리 풍경과 그 안의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 내 마음에 따사로운 햇살이 비춘다. 100분 동안 흠뻑 행복하고 싶다면 상영관을 찾아보자. OTT(Over The Top, 인터넷TV)를 통해서 보다 많은 관객에게 힐링을 선사할 수 있기를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