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민은 활화산이다. 눈에 보이기 전부터 진동이 느껴지고 뜨겁다. 어떤 모습일까. 그 등장을 기대케 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감독 윤종빈)에서도 그렇다. 언제 나오지…아, 지금이구나! 무엇을 기대했어도 그 이상이고, 얕은 상상력의 범주 밖에 있다. 영락없는 종교인, 그것도 영어 제목(Narco-Saints, 마약상-성자) 가운데 성자, 선한 목자로 첫 등장을 알린다.
목사로서의 면모에 익숙해질 즈음 황정민표 전요환은 본색을 드러낸다. 언제 목자였냐는 듯 느물거리는 마약상 자체이고, 여전히 성자의 탈을 쓰고 있기에 더욱 간교해 보인다. 영화 ‘너는 내 운명’의 그 순박한 총각과 같은 배우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 ‘영혼마저 갈아 끼운 듯’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거드름과 독기가 넘쳐 흐른다. 아니, ‘너는 내 운명’을 본 적 없다 해도 알아챌 수 있는 카리스마다.
황정민은 포토제닉하다. 카메라에 포착됐을 때 훨씬 더 매력적이고 멋지다. 영상카메라에 담겨 그림과 소리를 갖췄을 때 황정민은 그야말로 장면을 잡아먹는다. 그의 에너지에 압도된 채 실룩거리는 볼의 떨림과 입꼬리의 향방, 레이저를 쏘아대는 눈빛의 확산을 관찰하게 한다. 배우 황정민을 관찰하는 재미에 빠지다 보면, 극 깊숙이 빠져든 나를 발견한다.
영화는 때로 어느 한 장면으로 기억된다. 때로 한 장면만 좋았어도 만족감이 배가 된다. 황정민이 바로 그 한 장면을 만드는 재주가 신묘한 배우라는 것은 지난 8월 개봉한 ‘헌트’만 봐도 여실히 확인된다. 영화 주연이 아님에도, 우정 출연이었음에도 황정민은 미그기를 끌고 월남한 공군 장교 이웅평으로 분해 스크린을 씹어먹었다.
안기부 국내팀 장성철(허성태 분)이나 김정도(정우성 분) 팀장과의 줄다리기 속에 커다란 책상을 뒤엎을 땐 흡사 한 마리 야수 같았고, 영원히 길들여질 일 없는 야생의 크리처 같던 사내가 도대체 저 뒤집힌 테이블을 어떻게 바로 세울까, 기대를 키웠다. 어슬렁거리던 흑곰은 금세 직립보행의 악어처럼 늪을 쭉 미끌어져 들어와 책상을 뒤집어 제자리에 놓았다. 기막힌 움직임에 더해 눈구멍뿐 아니라 콧구멍과 입, 아니 온몸으로 시뻘건 불을 토하는 용처럼 끓어오르는 열기를 삽시간에 퍼뜨렸다. 옴짝달싹 못 하고 숨죽여 황정민의 원맨쇼를 감상케 했다.
‘수리남’에서 전요환은 강인구(하정우 분)에게 잡힐 운명이지만 결코 잡힐 것 같지 않은 강력함을 발산해야 했다. 전요환이 강할수록 강인구, 그 뒤에 선 국정원 최창호 팀장(박해수 분)과의 대립각에 날이 서고 ‘저놈을 잡고 싶다’는 열망이 시청자에게까지 옮아간다.
황정민은 패배란 일절 없고, 남의 나라 수리남에서 영원히 건재할 것 같은 마약왕의 위용을 뽐냈다. 덕분에 극은 더 쫀쫀해지고 전쟁은 핏빛이 됐다.
영화 ‘신세계’(2013)에서 배우 황정민은 골드문 기업 2인자라는 탈을 쓴 폭력조직 보스 정청의 엘리베이터 액션을 남겼다. 지금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눈을 질끈 감아도 지워지지 않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드라마 ‘수리남’에서 황정민은 전요환이라는 캐릭터를 남겼다. 목사의 탈을 쓴 마약왕. 황정민은 특정한 장면이 아니라 지금도 수리남 어딘가를 떠돌 것 같은 인물, 끈적하고도 살벌한 숨소리를 우리 가슴에 심었다.
주연이든 조연이든 카메오든 상관없다. 배우 황정민은 장면을 압도한다. 압도적 장악력으로 잊기 힘든 장면과 캐릭터와 분위기를 창조한다. 여러 색과 향과 맛의 배우가 모두 존재 의의를 지닌다. 이 지독의 정점에 서 있는 맵고 쌉싸름한 황정민의 맛을 대신할 누가 있을까. 가능할까.
그런데 우리는 알아버렸다. 대체제 없는 맛을 봤고 맛있다는 걸 알아버렸다. 이미 중독은 됐고, 그를 계속 볼 수 있는 작품들이 줄 잇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