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수출금지하자 中 반도체기업 육성 맞불
美 기업, 파견 기술자 중 업체서 철수시켜
中 업체 설치된 생산장비 기술지원도 중단
中 선전시, 반도체기업에 대규모 지원 약속
미국과 중국이 반도체를 둘러싸고 ‘벼랑 끝 승부’를 겨루는 형국이다. 미국이 첨단 반도체와 관련장비의 중국 수출을 사실상 금지하는 수출통제 조치를 발표하자 중국이 ‘반도체 자립’이라는 기치 아래 대규모 지원금을 내거는 등 거센 반격을 나선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반도체 장비업체들은 중국 반도체 생산기업에 대한 지원 중단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지난 12일 보도했다. 미 상무부가 7일 발표한 대중 반도체 관련 수출통제 조치에 따른 후속 조치다.
WSJ에 따르면 미 반도체 장비업체 KLA와 램 리서치는 중국 반도체 생산업체인 창장춘추(長江存儲·YMTC)에 파견했던 기술자와 직원들을 철수시켰다. 반도체 장비에 대한 기술지원을 하는 이들 직원은 창장춘추 공장의 운영과 생산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KLA는 반도체 테스트 장비를 생산하고, 램 리서치는 반도체 웨이퍼의 식각공정(회로패턴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깎는 것) 분야에서 기술력을 인정받는 업체다.
미 반도체 장비업체들은 이와 함께 이미 창장춘추에 설치된 자사 장비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으며 설치가 끝나지 않은 장비에 대해서는 추가작업을 하지 않는 것으로 전해졌다. WSJ은 미 업체의 지원이 중단되면 중국 반도체 업체들은 반도체 장비의 업그레이드와 유지뿐 아니라 반도체 개발에도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국 십자포화 공격에 중국은 반도체산업 육성을 통한 ‘자립’으로 맞섰다. 중국 광둥(廣東)성 선전(深圳)시는 반도체 설계와 실리콘 기반 집적회로(IC) 제조, 반도체 후공정(패키징)에 대해 각종 지원금을 약속했다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11일 전했다. 이 지원책은 고성능·고밀도 회로연결이 필요한 중앙처리장치(CPU)와 그래픽처리장치(GPU)의 설계·개발 등 중국 반도체산업의 약한 고리에서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선전시는 이를 위해 반도체 연구·개발 프로젝트에 해마다 최대 1000만 위안(약 20억원) 또는 해당 비용의 20%까지 지원을 약속했다. ‘리스크 파이브’(RISC-V) 같은 개방형 반도체 설계기술에 기반해 작업하는 기업, 국산 반도체 전자설계자동화(EDA) 소프트웨어 구매 기업에도 최대 1000만 위안의 보조금 등을 지원한다. IC산업을 위한 핵심 장비와 부품에 집중하는 기업이 관내 공장을 세우면 최대 3000만 위안을, 핵심 연구·개발·관리 인재가 관내 취업시 최대 500만 위안을 현금 보상하기로 했다.
특히 관내 반도체 기업이 생산라인을 개조할 때 설비당 최대 15억 위안의 보조금을 주고 전기와 물 사용료를 각각 60%, 50%씩 지원하기로 했다. 선전시는 지난 3월에도 50억 위안을 투자해 반도체 국유기업 성웨이쉬(昇維旭)를 설립했다. 성웨이쉬는 일본 메모리반도체 업계의 거물로 일본 유일의 D램 제조사이던 엘피다의 사장을 지낸 사카모토 유키오(75)를 최고전략책임자(CSO)로 영입했다. 최고경영자(CEO)에는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대만 타이지뎬(臺積電·TSMC)에서 공장장 등을 지낸 류샤오창(劉曉强)을 임명했다. 중국 기업정보사이트 치차차(企査査)에 따르면 성웨이쉬는 선전시 산하 국유펀드의 100% 투자로 설립됐으며 등록 자본금은 50억 위안이다. SCMP는 “선전시의 이같은 현금 지원책이 미국의 수출제한에 대응하려는 중국 반도체 업체들을 도울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면서도 “이는 지역 반도체산업 육성을 가속하려는 중국정부의 바람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중국 반도체 관련 창업 기업 수는 2019년 8442개, 2020년 2만 3111개에서 지난해 4만 7392개로 폭증했다. 중국 내 반도체 관련 기업은 지난해말 기준 12만 4000개에 이른다. 중국에서 반도체 기업의 창업이 많은 것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이다. 중국은 반도체 수입액이 원유수입액을 넘어선 2013년부터 ‘반도체 굴기’를 본격화했다. 2014년과 2019년 각각 1390억 위안, 2040억위안 규모의 1·2차 ‘국가반도체산업투자펀드’를 조성했다. 1차 펀드는 반도체 기업 23곳에 투자했고, 2차 펀드는 올 8월까지 전체 조성금의 3분의 1 정도인 790억 위안을 지원했다. 2015년에는 첨단 제조업 육성전략인 중국제조 2025를 내놨다. 반도체 부문에선 2025년까지 자급률을 70%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정부의 대규모 투자에 힘입어 중국의 반도체 생산량은 급증했다. 2010년엔 58억 달러(약 8조 3000억원)어치에 불과했지만, 2021년엔 312억 달러어치로 5배 이상 증가했다. 중국은 올 1분기 파운드리 분야에서 세계 점유율 10%를 차지했고, 7월엔 첨단 반도체로 분류되는 7나노급 반도체 개발에 성공했다는 관측이 나왔다. 석·박사급 인재들이 반도체 설계 등에 대거 뛰어들어 팹리스(반도체 설계) 기업만 2000여곳에 이른다.
미국은 ‘벌떼 공격’으로 추격하는 중국을 뿌리치기 위해 필사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첨단 반도체를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생산 장비의 수출을 금지한 조치가 대표적이다. 직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램 리서치 등 미 기업이 중국 반도체 기업에 반도체 장비를 판매하는 것을 금지했다. 주목되는 점은 세계 유일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업체인 네덜란드의 ASML에 핵심 장비의 중국 수출을 막았다. 노광장비는 파장이 짧은 자외선을 활용해 반도체 웨이퍼에 길(회로)을 새기는 역할을 한다. 7나노 이하 첨단 반도체를 만들려면 이 회사의 극자외선 노광장비가 필수적이다. 중국은 구형 노광장비로 7나노 반도체를 만들지만 작업 효율이 떨어져 경제성을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선전시의 반도체 진흥계획은 미국이 중국에 대한 첨단 반도체, 장비 수출을 금지하기로 발표한 직후 나왔다. 미 상무부는 7일 중국을 정조준한 두 가지 신규 수출통제 조치를 발표했다. 우선 고성능 인공지능(AI) 학습용 반도체와 중국 슈퍼컴퓨터에 사용되는 특정 반도체 칩을 중국에 수출할 경우 허가를 받도록 했다. ‘수출통제명단’에 포함된 28개 기업에 대해서는 통제 범위를 확대하고, 수출통제명단에 넣지는 않았지만 관심대상을 의미하는 ‘미검증명단’에 31개 기업을 추가했다. 상무부는 이 조치에 ‘해외직접생산품규칙’(FDPR)을 적용해 미국이 아닌 한국 등 다른 나라에서 만든 반도체라도 미국산 소프트웨어나 장비, 기술 등을 사용했으면 수출을 금지했다.
두 번째는 미 기업이 ▲ 18nm(나노미터·10억분의 1m) 이하 D램 ▲ 128단 이상 낸드 플래시 ▲ 14nm 이하 로직칩을 생산하는 중국 기업에 반도체 장비를 수출하는 것을 사실상 금지했다. 미 기업에만 해당하는 조치지만, 생산시설의 소유가 중국 기업일 경우에도 해당된다. 이 조치에는 미 기업뿐 아니라 미 시민권자나 영주권자가 중국 반도체 업체를 지원하는 것을 제한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이번 조치를 발표하기 앞서 바이든 정부는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램 리서치 등 반도체 장비업체들에 14㎚ 이하 반도체 미세공정에 필요한 장비를 중국 수출을 금지했다. 데이터센터에 쓰이는 AI용 고성능 컴퓨팅그래픽처리장치(GPU)의 대중 수출제한 조치를 양대 GPU 제조사인 엔비디아와 AMD에 통보했다. 대만 중앙통신은 “중국 반도체 기업은 28nm 수준의 구형공정이 대부분이고 중국 1위 파운드리인 중신궈지(中芯國際)의 14nm 공정도 실험단계라 당장 중국 반도체 생산에 치명적 영향은 없겠지만, 선진기술 도입에 차질이 빚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가운데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이달 세번째 연임을 확정하면 ‘중국제조 2025’를 업그레이드해 반도체 드라이브를 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시 주석은 지난 6월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의 반도체 관련 기업을 방문해 “기술자립이 중국 번영의 토대이자 국가안보의 핵심”이라며 “우리는 기술 생명줄을 우리 손으로 잡아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글/김규환 국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