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미국과 맞서는 주요 2개국(G2)으로 끌어올리는 발판을 다진 장쩌민 전 국가주석이 30일 사망했다. 96세.
관영 신화통신은 장 전 주석이 이날 오후 12시13분쯤 상하이에서 백혈병, 다발성 장기부전 등을 치료받다가 타계했다고 보도했다. 지난달 열린 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는 지난 2019년 국경일 70주년 기념행사에서 후진타오 전 주석과 함께 연단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공개 석상의 마지막이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그의 사망이 중국 정부가 톈안먼 민주화 시위 이후 볼 수 없었던 전국적인 정치적 반대 운동에 직면한 미묘한 순간에 찾아왔다고 평가했다.
덩샤오핑에 이어 중국 제3세대 지도자인 장 전 주석은 통치 기간 중 공산당 총서기(1989~2002년),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1989~2004년), 국가주석(1993~2002년)으로 당·정·군을 장악했다. ‘태자당’(혁명원로 자녀그룹)·‘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과 함께 공산당 3대 파벌인 ‘상하이방’(상하이 출신 정·재계 인맥)의 수장이었다.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시위 후 덩샤오핑에 의해 전격 발탁돼 2002년 후 전 주석에게 당총서기직을 물려줄 때까지 중국 대륙을 이끌었다. 마오쩌둥·덩샤오핑과 같은 카리스마는 부족하지만 중국이 세계의 강국으로 부상하는 발판을 만든 인물이라는 점에는 별다른 이론이 없다.
장 전 주석은 상하이시 당서기 시절인 톈안먼 민주화시위 때 학생들을 옹호했다가 실각한 자오쯔양 당총서기의 후임으로 하루아침에 중국 정치 중앙무대에 등장했다. 학생·시민들의 민주화 시위로 위기를 맞은 덩샤오핑이 그해 5월31일 그를 베이징으로 불러 당총서기를 맡겼다. 경제적 개혁·개방을 추종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보수색채가 강했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시위진압 총대를 멘 보수파 리펑 총리나 차오스 정치국 상무위원 등 유력 후보를 제치고 장 전 주석은 6월 열린 공산당 제13기 4중전회에서 당총서기로 선출됐다. 그는 훗날 “전혀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고 회고했을 정도로 갑작스러웠다.
장 전 주석은 처음에는 덩샤오핑의 가려 실권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톈안먼 시위에 대해 “일말의 관용도 없다”며 강하게 몰아붙이며 권력을 강화해 갔다. 그해 12월 당중앙군사위 주석에 올랐다. 1992년 덩샤오핑이 사실상 은퇴한 뒤 1993년 국가주석에까지 오르며 당·정·군 권력을 모두 장악했다.
그는 임기 동안 중국이 고도 경제성장을 지속하면서 사회주의 시장경제로 전환을 계속했다. 국가가 100% 소유하고 있던 국유기업의 지분을 일부 민간과 외국인에게 매각하는 등 시장경제 요소가 증가하는 구조개혁이 진행됐다. 이를 바탕으로 중국은 2001년 베이징 하계올림픽(2008년) 개최권 획득에 이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함으로써 세계 무대로 진출해 G2의 기반을 닦았다.
일국양제(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공존)를 내걸고 홍콩 반환(1997년) 마카오 반환(1999년)도 장 전 주석의 임기동안 이뤄졌다. 1997년 미국 국빈 방문과 1998년 빌 클린턴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으로 톈안먼 사태 이후 냉랭했던 미중관계도 해빙의 기시를 맞았다.
2002년 당장(당헌법)에 삽입된 장쩌민의 3개대표 사상은 개혁·개방에 따라 주요 사회 세력으로 성장한 자본가와 지식을 포용해 공산당의 권력 기반을 자본가 계급으로 넓혀야 한다는 이론이다. 공산당은 노동계급의 선봉대라는 이전의 규정을 뒤집고 ‘자본가, 지식인, 노동자·농민의 이익을 대표한다’고 명시함으로써 공산당을 계급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 규정했다
은퇴 이후에도 상하이방의 원로로서 중국 정계에 깊숙이 개입하며 현역 지도자를 견제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는 중국 정치의 안정과 경제 성장을 이뤄낸 지도자로 평가되지만 그의 권력욕과 ‘부패 유산’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적지 않다. 장 전 주석의 ‘상하이방’은 정치적 이너서클이자 경제적 이익집단으로 변질됐다. 여기에다 중국이 경제성장에만 집중하면서 빈부격차와 환경 파괴를 방치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