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면 탄생 배경부터 늦깎이 감독의 일상까지
감독 이창열은 순수하다. 그가 연출한 영화 ‘그대 어이가리’도 순수하다. 제작사 이름도 ‘영화사 순수’이다. 순수함이 통했다. 해외 각종 영화제에서 한국적으로 아름다운,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요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우리 곁에 있음을 일깨우는 이 영화에 51개의 트로피를 안겼다.
지난 8일 개봉한 이후 극장가에서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고 있지만, 영화를 본 관객들의 만족도는 높다. “오랜만에 사람 냄새 나는 영화” “눈물이 나서 혼났다” “돌아가신 엄마 생각났다” “담담하면서 현실적이어서 다큐멘터리 같다” “가슴으로 느끼게 하는 섬세한 배우들의 연기, 수묵화 느낌의 영상” 등 호평 일색이다.
사실 ‘그대 어이가리’(감독 이창열, 제작·배급 ㈜영화사 순수)의 장점을 말하자면 끝이 없다. 51개의 트로피가 괜히 주어진 것은 아니고 독립영화를 대상으로 한 영화제라고 해도 제50회 남부 영화예술 아카데미영화제에서 6관왕, 제42회 파이브 콘티넨츠 국제영화제 11개 부문 전관왕을 탄 이유가 분명 있다.
영화는 죽음으로 시작해 죽음으로 끝나지만 실은 삶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의 전통 장례식, 상엿소리로 처음과 끝을 장식하고 주인공 노연희(정아미 분)의 투병과 가족의 간호에 초점이 맞춰지나 작품의 결이 결코 어둡기만 하진 않다.
또, 뮤지컬 영화가 아니지만 배우 선동혁(연희남편 윤동혁 역)의 소리와 몸짓을 빌려 다양한 우리의 소리와 춤사위가 영화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다. 선동혁은 진도씻김굿 길닦음 대목을 민살풀이 춤사위 속에 부르기도 하고, 아내의 맺힌 응어리를 풀어 먼저 하늘로 보내는 진혼곡을 상엿소리(만가)로 부른다.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우리가 극장 문을 나설 때도 선동혁의 구음이 우리를 배웅한다.
‘그대 어이가리’의 압권은 진도씻김굿 길닦음 대목 소리와 민살풀이 춤사위 장면에 깃들어 있다. 전 세계 어느 나라 영화에서도 나오기 힘든 방식의 ‘선택’이 그려진다. 지난 2013년 65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된 프랑스영화 ‘아무르’(감독 미카엘 하네케, 수입·배급 티캐스트) 역시 인간의 존엄사 문제를 다뤘고, 남편의 어떤 선택이 등장하고, 세계 각지에서 온 영화인들은 황금종려상 트로피로 찬사를 표했다. 10년이 지나서 가능했던 ‘그대 어이가리’의 선택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문화적 차이가 베개를 떡으로 바꿔 ‘선택’의 결행 방식에서 폭력성을 덜어냈다. 심지어 한 폭의 수묵담채화처럼 아름답다.
문화적 차이는 또 하나의 큰 차이를 이뤄냈다. 윤동혁은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사진 한 장을 본다, 그리고 두 번째 ‘선택’을 한다. 첫 번째 선택이 단지 아내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더더군다나 자신의 편의를 위한 이기적 행동이 아니었고, 가족의 미래와 사회적 세대 재생산을 위한 결행이었음을 분명히 하는 장면이다.
당연히 한국과 프랑스의 문화적 차이만으로 이런 명장면이 탄생하지는 않는다. 세계적 감독 미카엘 하네케 이상의 번민과 모색, 성찰 끝에 ‘결정적 장면’ 두 가지를 영화적으로 탄생시켰다. 거기에 우리의 가락과 춤을 입힌 것은 그야말로 기막히게 예술적이다.
이창열 감독을 직접 만나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명장면 탄생의 과정과 배경을. 다음은 영화 ‘그대 어이가리’의 의상감독을 맡아 상여와 의상과 소품들에 우리의 멋과 아름다움을 드리운 이유숙 한복디자이너의 공방에서 만나 나눈 이야기다.
1. 얘기를 거꾸로 풀어보겠습니다. 마치 동혁과 연희가 함께 춤추며 이별하는 듯한 명장면.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이 장면은 한 폭의 한국화처럼 예술적이고, <그대 어이가리>뿐 아니라 한국영화사의 백미라고 생각합니다. 정인을 보내는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처절한 장면, 가장 한국적 노래와 춤까지 곁들여진 이 장면을 어떻게 생각하게 되신 걸까요
“인간은 태어나서 짧은 삶을 살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무한한 삶이 아닌 것이죠. 안타까운 것은 누구나가 현재의 삶이 영원할 거라는 착각 속에산다는 것입니다. 지나고 보면 정말 짧은 인생인데 그 속에서 매일 전쟁하듯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 또한, 우리 부모님 또한, 우리 아내 또한 그런 삶을 살아왔고 또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극 중 동혁이와 연희도 마찬가지이었을 것입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두 사람에게도 이런 불치의 병에 걸려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도래하게 됩니다. 어떤 이유로든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비극이고 아픔입니다.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 하는 사람의 마지막 길이라도 아름답게 마치 ‘축제의 노래’를 하듯이 표현하고 싶어 이 장면을 연출하게 되었습니다.”
2. 프랑스영화 ‘아무르’를 볼 당시엔아내를 보내는, ‘아끼는 이’의 인격을 존중하는 지극한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을 보았습니다.이 이상이 가능할까 싶었는데, ‘그대 어이가리’를 보고 나니생각지 못했던 그 장면의 폭력성을 느끼게 됐습니다.영화 ‘히든’ ‘퍼니 게임’ ‘하얀 리본’ 등을 폭력에 대한 경계와 경고를 쉼 없이 해 온 미카엘 하네케인 만큼 의도된 폭력성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문화적 차이, 사고의 깊이에서 결과된 ‘죽음의 방식’으로 보입니다.‘그대 어이가리’에서 아내 연희는 스스로 좋아하고 원하던 행동을 합니다. 동혁은 아내에게 손도 대지 않았고, 되레 진혼곡과 살풀이춤으로 아내의 마지막 길을 배웅합니다. 멀리 보이는 산과 눈앞의 물, 자연이 묵인하고 용서하는 듯한 선택입니다. 기막히게 아름다우면서도 철학적이고, 최대한 ‘무해한’ 장면을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사실 이 부분이 제일 힘들고 어려운 장면이었습니다. 타인에 의한 죽음은 어떤 상황으로도 납득이 되거나 용인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님도 그 부분을 가장 많이 고민하고 가장 힘들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저 또한 두 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 안에 저 나름의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결말을 짓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의도와 생각을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관객들께 설명하지 않고도 관객 스스로 느끼실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함께 공감할 수 있을까 등등에 관하여 가장 많이 고민하고 가장 자연스럽게 복선을 배치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3. 캐릭터가 배우의 인성에 기대듯, 이 장면에는 감독의 인성과 살아오면서 중시해 온 가치가 그대로 담겼다고 생각합니다.인생을, 사람을 어떤 태도로 마주하며 살아오신 분일까,궁금해지는 장면이었습니다.인생에서 가장 중시하시는 바가 뭘까요
“세상의 모든 생명은 존엄하고 숭고하다는 생각을 하고 삽니다. 그 대상이 비록 말을 못 하는 식물이나 꽃이라 할지라도 숨 쉬고 살아있는 생명이라면모두 그런 것이죠. 하물며 인간은 너무나 존엄하고 귀하기 때문에 형언하거나 표현하기가 벅차고 어렵습니다.”
4. 엔딩 장면을 포함해 시작부터 끝까지 선동혁이라는 배우가 없었다면, 배우 생활을 하면서 눈을 넓게 멀리 두어우리 소리와 춤 공부에 매진한 배우가 없었다면 쉽지 않았을 영화라고 생각합니다.선동혁 배우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는지 궁금합니다.
“8년쯤 전에 우연한 기회로 만나 막걸릿집에서 술 한잔하시고 부른 선배님의 창 한가락에 매료되어 그 인연을 지금까지 이어 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기본적으로 불치의 병을 소재로 한 부분은 저의 기획이지만, 창과 우리나라의 전통적 문화를 접목한 건 선배님을 생각하며 의도한 부분이 있습니다. 너무 감사한 인연이지요.”
5. 인연을 악연으로 만드는 사람도 있고 운명으로 만드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대부분은 그저 스쳐 지나가게 두고 서로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치지도, 큰일을 만들어내지도 못하고요.
감독님께서는 선동혁 배우와의 인연을, 끝내 이렇게 대단한 작품으로 완성해 내셨습니다.인연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는 분인 듯합니다.
“기본적으로 선동혁 선배님은 연기에 대한 내공이 엄청나신 분임에는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창을 잘하신다는 부분에서는 대다수 모르고 있습니다. 다행히 저는 처음 만난 8년 전에 이미 그런 선배님의 귀한 능력을 잘 알고 있는 연출자다 보니 그때부터 언젠가 기회가 오면 한번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6. 정아미 배우의 연기가 인상적입니다. 너무 과하지 않게 현실적이면서도 역시나 영화답게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지점들이 있습니다.이 배우가 이토록 연기를 잘하는 배우였던가, 미리 알아채지 못한 한 명의 관객으로서 부끄러웠습니다. 정아미 배우를 캐스팅하신 안목이 대단합니다.어떻게 출연하게 되었을까요?
“캐스팅 과정에서, 얼굴이 알려진 배우분들께서 출연 의사를 밝힌 일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드라마의 특성상 힘든 연기이고 알려진 얼굴로 편견을 가질지 모른다는 생각에얼굴과 이름이 많이 노출되지 않으면서도 오랜 시간 연극으로 다져져, 긴 호흡을 표현하는 데 전혀 문제없을 배우를 찾던 중 정아미 배우님 같은 보석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7. 사위 태훈 역의 장태훈 배우가 웃음 주는 연기를 잘했습니다.사위라는 캐릭터가 영화에 이완 작용을 하고 무거움과 가벼움, 기쁨과 슬픔의 균형을 맞추는 기능을 실행합니다. 뻔하지만 필요한 요소이고,장태훈 배우는 이 전형적 영화 문법이 뻔하게 느껴지지 않도록생동감 있게 연기했습니다.어떤 디렉팅을 주셨을까요?
“사실 ‘그대 어이가리’는 배우 캐스팅 이후 촬영하기 전까지 거의 3개월 이상, 주 2회에 걸쳐 마치 현장에 있듯이 리딩과 독해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각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장, 단점들을 촬영 전에 이미 완성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그런 과정에서 배우들과 많은 교감이 형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장태훈 배우 또한연기에 대한 욕심이 너무 많다 보니 리딩이 끝난 후에도 매일 한 시간 이상 통화를 하며 가장 최적화된 캐릭터를 찾아 나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저는 도리어 ‘너무 많은 준비가 오히려 독이 될 것 같으니 80% 정도만 준비하고 나머지 20%는 현장에 와서 해라’ 주문했었습니다. 모든 배우가 열심히 임해 주셨습니다,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