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결정 존중한다"…원론적 입장 반복
'이념전쟁'으로 확산…'중도층 표심' 의식
홍범도 장군의 흉상 이전 논란에 대해 국민의힘이 말을 아끼고 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홍 장군 흉상 논란이 '이념전쟁'으로 확산하면서, 이 논란에 끼어들면 끼어들수록 국민의힘에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이 작용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당장 윤석열 대통령 지지율도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4일 국민의힘은 최고위원회의나 논평 등 어디에서도 홍 장군 흉상 이전 논란에 대해 당의 공식적인 입장을 내지 않았다.
앞서 육군사관학교는 홍 장군 흉상을 육사 경내에서 독립기념관으로 이전한다고 발표했다. 대통령실은 홍 장군 흉상 이전 문제를 육사와 국방부에 맡기겠다는 입장이지만, 사실상 지지하고 있는 모양새다.
윤 대통령은 홍 장군 흉상 이전 문제와 관련해 "어떻게 하자고 하진 않겠다. 다만, 문제를 제기하고 한 번 어떤 게 옳은 일인지 생각해보는 게 좋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지난달 30일 전해졌다.
또한 이날 대통령실은 홍 장군 흉상 이전 논란과 관련한 문재인 전 대통령의 비판에 대해 "전직 대통령이 지나치게 나서는 것이 문제"라고 밝히며, 다소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그간 국민의힘은 여당으로서 정책‧현안 등과 관련해 대통령실·정부 입장을 적극 옹호하며 힘을 보탰다. 예를 들어 윤 대통령이 비영리민간단체(시민단체) 국고보조금 비리에 대해 "단죄와 환수조치를 철저히 하라"고 특명을 내리면 국민의힘은 태스크포스(TF)를 열고 '시민단체 개혁'에 나섰고, 윤 대통령이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 집회를 비판하면, 국민의힘은 '불법 집회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국민의힘은 홍 장군 흉상 이전 문제는 정부 결정을 존중한다는 원론적 입장을 취할 뿐, 이와 관련해 적극적으로 메시지를 내고 있지는 않다. 내년 총선에서 '중도층 표심'을 잡아야 하는 국민의힘으로서는 이념 전쟁에 끼어들기가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당장 더불어민주당은 홍 장군의 과거 행적 등을 둘러싼 정부의 공세에 대해 '윤석열 정부가 이념전쟁을 부추기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권칠승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이날 "윤석열 정부의 '홍범도 장군 행적 지우기'가 갈수록 가관"이라며 "대한민국이 일제 치하로 되돌아온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고 말했다.
박성준 민주당 대변인도 브리핑에서 "국민은 경제 위기와 민생 파탄의 고통에 빠져 아우성치는데, 윤 대통령은 이념전쟁만 부추기고 있는 것이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이라고 비판했다.
국민의힘 내부에서는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굳이 '홍범도 논란'을 확전(擴戰) 시킬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영남을 지역구로 둔 한 초선 의원은 "당이 연일 '중도층' '중도층'을 외치고 있지만, 굳이 이 시점에 홍범도 논란에 끼어드는 것은 중도층을 떠나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밝혔다.
부담스러워진 국민의힘 지도부는 홍 장군 흉상 이전 문제는 당이 개입할 사안이 아니라는 입장을 반복하고 있다. 다만 이철규 사무총장은 전날 페이스북에서 "홍범도 장군의 흉상은 육군사관학교보다는 독립기념관에 모시는 것이 타당하고 합리적"이라고 했다.
그는 "볼셰비키즘을 신봉하고 동족을 향해서도 공산주의자가 아니면 적으로 돌렸다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국군의 사표(師表)로 삼을 수는 없다"며 "정파적 시각에서 벗어나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평가하고 합당한 예우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군인 출신이자 국회 국방위원회 여당 간사인 신원식 의원도 같은 날 페이스북에 "홍범도 장군은 '독립투사'였지만 적지 않은 기간을 '공산당원'으로 살았기에 흉상을 굳이 대한민국 '반공·호국 간성의 요람'인 육사에 설치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흉상은 육사가 아닌 항일투쟁과 연관된 장소로 이전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기본 중의 기본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당 지도부 관계자는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문제는 국방부에서 알아서 할 문제이며, 당에서 특별히 다른 메시지가 나가지는 않을 것"이라며 "이철규 총장이나 원내 신원식 의원 등 당내 다양한 의견을 참고해 달라"고만 했다.
한편 이런 상황 속에서 윤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율이 한 주 만에 하락해 30%대 중반을 기록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이날 나왔다. 홍 장군 흉상 이전 논란이 영향을 미쳤다는 해석이다.
리얼미터가 미디어트리뷴 의뢰로 지난달 28일∼이달 1일 닷새간 전국 남녀 유권자 250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윤 대통령의 국정 수행에 대한 긍정평가는 전주보다 2.2%p 내린 35.4%로 집계됐다. 부정평가는 직전 조사보다 1.7%p 오른 61.1%로 집계됐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되다.
배철호 리얼미터 수석전문위원은 "이번 주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전주부터 이어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공방보다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등 역사·이념 논쟁이 더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