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영수회담에 집착하는 까닭은
이번엔 법원찬스 덕으로 되살아나
양비론에 환승하는 일부 보수언론
역대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영수회담이라는 것을 가졌지만 한 번도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다는 기록은 없다. 청와대에서 만나 악수하고 대화하는 사진을 찍는 게 전부였던 회담이었다. 돌아서기 무섭게 말이 달라지고 특히 야당 측에서 원망과 비난이 쏟아졌다. ‘영수회담’으로 화해와 협력의 정치가 실현될 것이었다면, 애초에 그런 형식의 회담이 필요할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국민도 우리 정치의 특징이 무한투쟁이라는 것을 옛날에도 알았고 지금도 안다. 그것이 한국 정당정치의 동력이다. 물론 정당정치는 상호 경쟁을 전제로 한다. 늘 웃는 얼굴로 타협하고 양보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능사는 아니다. 그런 정치과정이야말로 정당들에는 독이 된다. 특히 야당의 경우는 더 그렇다. “NO”야말로 야당의 존재 의의이기 때문이다.
여야 영수회담에 집착하는 까닭은
문제는 우리 정당정치의 과정은 경쟁이 아니라 투쟁이라는 데 있다. 그래서 언제나 살벌하다. 정당이 투쟁을 포기하는 것은 존립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인식된다. 얼마나 ‘가열차게 투쟁’(과거 운동권 표현으로)하느냐로 야당에 대한 유권자의 점수가 매겨진다. 선명성·투쟁성(다르면서도 같은)이 야당을 지탱하는 두 기둥이었다.
‘대화 설득 타협의 정치’는 이상론이긴 하지만 반현실적 언어다. 우리 정당정치는 ‘투쟁’없이는 성립되기 어려운 구조다. 겉보기는 멀쩡한 사람들이 온갖 험한 표현을 동원해가며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싸운다. 교양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안 보인다. 당이 필요로 하는 인재는 소총수 저격수의 소질을 갖춘 겁 없는 초년병들이다. 초선 의원들이 순수할 것이라는 생각은 기대에 불과하다. 인격을 내팽개친 천박한 싸움의 기술을 습득하는 과정인데 ‘순수’라니!
여야 관계, 정부와 정당 관계의 기본 틀이 이렇다. 영수회담이 생산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을 리 없다. 그걸 여야 정당도 알고 회담 당사자인 영수들도 안다. 그러면서 국민들에게는 무슨 대단이 위대하고 거룩한 의논 혹은 담판이라도 할 것처럼 부풀려 말한다.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 회담’이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영수회담(領袖會談)이라고 포장하는 것도 진정성과는 거리가 멀다. 옷깃(領)과 소매(袖)는 아주 두드러져 보이는 부분이다. 이 연유로 영수가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쓰인다. 이런 표현을 선호한다는 자체가 벌써 권위주의적 의식이라고 하겠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작년 8월 당 대표가 된 후 지금까지 8차례나 영수회담을 제의했다(TV조선, 9.30). 윤석열 대통령이 한 번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는 지치지도 않고 스토킹이라도 하듯 졸라댔다. 거대 정당의 대표가 되자 사법리스크를 벗어던지고 정통정치인으로 대접받고 싶었을 수 있다. 대통령의 정치 파트너 지위가 굳어진다면 검찰이 욱죄고 들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을 법하다. 당내의 지위가 확고해지면서 차기 대선 가도도 넓게 열릴 것이라는 기대도 물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윤 대통령에게 “나를 만나서 내 얼굴의 얼룩을 지워달라”는 요구를 한 셈이었다.
이번엔 법원찬스 덕으로 되살아나
윤 대통령으로서는 아무리 야당의 대표라도 쉽게 만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만남 자체가 면죄부로 인식될 개연성이 높다. 검찰은 난처한 처지에 몰린다. 바꿔 말하자면 대통령이 검찰 수사에 개입하는 결과를 빚을 수 있다. 게다가 만나봐야 이 대표의 원맨쇼를 거드는 조역이 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담을 가져야 할 만큼 우호적인 관계도 아니고 정치적 위기에 빠져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이 법원에 의해 기각됐다. 정치권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분위기가 급변했다. 마치 이 대표의 무죄가 입증된 듯한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검찰은 무고한 사람을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압박해온 폭력집단으로 매도당하게 됐다. 반면에 이 대표는 온갖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의연하게 야당 대표의 역할을 수행해 온 큰 정치인으로, 이미지 세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
“과연 이재명!”
감탄이 절로 나온다. 구속영장 청구가 기정사실화되자 느닷없이 ‘무기한 단식’을 선언한 것 부터가 책략적 대응이었다. 지난 2월에 이어 다시 민주당이 체포동의안을 가로막고 나서주기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고 그는 ‘단식’을 택했다. 본회의 표결에서 비명계 의원들의 찬성투표로 체포동의안이 가결되었지만 이번엔 ‘법원 찬스’가 그를 나락에서 구해냈다.
이 기회를 놓칠 이 대표가 아니다. 대반격의 계기로 삼은 것이다. ‘여야영수회담 제의’도 그 일환이다. 대통령이 수용하지는 않겠지만 명분 싸움에서 대통령을 궁지로 몰 가능성은 있다. 그간 흐트러졌던 당내 분위기를 일신해서 ‘이재명의 민주당’체제를 재구축할 계기로 삼는데도 유효한 수단이 된다. 검찰이 마녀사냥을 한다고 소리 지르던 이 대표와 민주당은 되레 검찰을 ‘마녀’로 몰아갈 계기를 맞은 셈이기도 하다. 이 기세로 정부·여당을 몰아세우면 내년 총선에서의 승리를 기약할 수 있고, 윤석열 정부는 조기레임덕이 불가피해진다.
양비론에 환승하는 일부 보수언론
민주당만의 계산이 아니다. 구속영장 기각이후 사회적 분위기에 변화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언론이 민감하다. 종전엔 이 대표에 대해 비판‧비난 일색이던 보수언론 중에서도 논조 조정에 들어간 곳이 눈에 띈다. 검찰이 무리한 수사와 내용 빈약한 구속영장 청구로 상황을 악화시킨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정부 여당이 정치를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도 보태기 시작했다. 정권 측 비판에 더 힘을 싣는 인상이다. 양시·양비론만큼 편리한 도피처도 달리 없다. 일부이긴 하지만 한국 언론의 속성이 그렇다.
이 대표가 국회의원·당 대표가 된 후에 입건해서 수사를 벌였다면 비난을 받을 여지가 있다. 그에 대한 온갖 다양한 의혹과 혐의들은 작년 대선 이전에 불거지기 시작했었다. 이에 연루된 인사 3명이 잇달아 자살하는 충격적이고 미스터리한 사건도 있었다. 과거의 정치상식이라면 선출 공직에 나설 생각조차 못할 처지였다. 그렇지만 이 대표는 온갖 의혹을 깔아뭉개면서 대선에 이어 국회의원 보궐선거에다 당 대표 경선에까지 출마해서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고도 입만 열면 ‘정치탄압’ ‘야당탄압’이다. 여기에 무슨 양비론의 여지가 있다는 것인가.
예로써 최강욱 전 의원의 경우를 보자. 선거 이전에 기소됐으나 3년 8개월 만에야 집행유예 형이 확정됐다. 그는 이미 3년 4개월 가까이 의원직을 누렸다. 세비와 각종 수당과 지원금 등을 다 받아 챙겼다. 국회의원으로서의 권한 행세도 다 했다. 대정부 질문에서는 온갖 거드름에 호통을 여과 없이 쏟아냈다. 그 금전적 정서적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 몫이 됐다.
야당 의원 중에는 유사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여럿 있다. 이 대표도 재판이 끝나 봐야 안다. 무죄 추정의 원칙은 소중하지만, 그게 바로 면죄부일 수는 없다. 범죄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게 된 부담을, 적어도 일부는 자신이 져야 한다. 정치인 수사 모두가 ‘정치탄압’으로 치부된다면 검찰은 필요악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악의 축이 되고 만다. 민주적 정당성 위에 성립한 정권에서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