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면 변하라는 인요한의 경고
대통령으로부터 독립·자립해야
중앙당 독점 공천제로는 안 된다
인요한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이 27일 언론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공감이 가는 진단이다. 영남의 정치적 호족들이, 전통적으로 보수정당을 장악한 채 좌지우지해 왔음은 역사적 사실이다. 다른 지역 정치인이나 유권자들의 소외감 거부감은 자연스런 현상이었다고 하겠다. 물론 더불어민주당과 호남의 관계도 다르지는 않지만 인 위원장이 혁신해야 할 대상은 국민의힘이다.
살려면 변하라는 인요한의 경고
“죽으려면 안 변해도 된다”는 말에 국민의힘 지도부와 영남출신 의원들이 충격을 받지 않았다면 이미 상황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래서는 인 위원장이 아니라 누가 혁신위를 맡더라도 국민의힘 재기(再起)는 불가능하다. 쇼크를 받았다면 변화를 절체절명의 과제로 인식하고 그 길을 모색해야 한다. 깨닫기는 했는데 행동하긴 꺼려할 때는 역시 망하는 일만 남는다.
중국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군주 환공(桓公)이 이곳에 들른 명의 편작(扁鵲)을 빈객으로 맞이했다. 편작이 환공을 보고 말했다.
“왕께서는 피부에 병이 있는데 치료하지 않으면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환공은 자신에겐 병이 없다며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편작이 물러간 다음 신하들에게 시쳇말로 ‘뒷담화’를 했다.
“의원이란 자들은 이익을 탐하여 병도 없는 사람을 가지고 공을 세우려고 한단 말이야.”
닷새 뒤에 환공을 알현한 편작은 말했다.
“임금께서는 혈맥에 병이 있습니다. 바로 치료하지 않으면 훨씬 깊어질 것입니다.”
환공은 단호히 부인했다.
닷새 뒤 편작이 환공을 만나 주의를 주었다.
“군께서는 장과 위 사이에 병이 있습니다. 치료하지 않으면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갈 것입니다.”
환공은 아예 대답을 하지 않았다. 편작이 물러간 후 환공은 매우 언짢아했다.
닷새 뒤 편작은 환공을 멀리서 바라만 보다가 그냥 물러갔다. 임금이 사람을 보내 까닭을 물었다.
“병이 골수까지 들어가면 사명(司命: 인간의 생명을 주관하는 고대 전설 속의 신)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간엔 고칠 수단이 있었지만 이제 병이 골수에 이르렀으니 저는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 닷새 후에 환공은 몸져 누웠다. 편작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떠나버린 후였다. 환공은 결국 죽었다.
편작의 성은 진(秦)이고 이름은 월인(越人)이다. 젊었을 때 여관의 관리인으로 있었는데 장상군(長桑君)이라는 사람이 와서 머물곤 했다. 편작의 사람됨을 알아 본 장상군이 어느 날 그를 조용히 불러 약을 주어 먹게 하고 의서를 전한 뒤에 홀연히 떠났다. 약을 먹은 지 30일이 지나자 장상군이 말한 대로 담장 너머 숨어 있는 사람이 보였다. 이런 능력으로 환자를 보자 오장 속 질병의 뿌리가 환히 보였다. 그는 제나라 조나라를 오갔는데 조나라에 있을 때 편작(중국 삼황오제 시대의 명의)으로 불렸다(『사기』 “편작·창공 열전”).
대통령으로부터 독립·자립해야
몸의 병이 아니라 정치·사회적 병리를 꿰뚫어보는 편작도 있다. 우리 국민 대다수가 그 점에서는 편작이다. 국민의 눈에 환하게 보이는 정치적 병폐들을 정치인들은 못 보는 듯이 행동한다. 정말 안 보여서 그런다면 이는 이기심에 눈이 가려진 탓이다. 보이는데도 안 보인다고 한다면 이는 문제를 회피하고 싶어 하는 심리 때문이다.
국민의힘에 파고든 병을 다스릴 편작으로 인 위원장이 기용됐다. 말이 좀 앞서는 인상을 주는 게 위태해 보이긴 하지만 달리 더 나은 선택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가 국민의힘이 앓고 있는 가장 큰 병으로 영남당(혹은 낙동강하류당) 구조와 현상을 지적했다. 새로운 발견이 아니다. 당원이나 국민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걸 초빙 받은 의사가 소리 내서 짚어낸 것이다.
문제는 영남세가 강한 국민의힘이 이 진단을 수용하고 처방을 따라주느냐의 여부다. 영남의 중진, 낙동강 하류의 스타들이 눈을 부라리면서 저항한다면 ‘인요한 혁신위’는 표류하게 될 수도 있다. 이들이 당에 대한 헌신과 희생의 정신을 발휘해서 지역구를 떠날 결심을 해주면 야 좋겠지만 그게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못된다. 당 지도부의 확고하고 결연한 혁신 실천 의지가 요구되는 대목이다.
차제에, 당연히 당의 공천제도와 룰도 혁신위가 다뤄야 한다. 중앙당 주도의 공천은 ‘국민의 선택’을 가장한 정치 실력자들의 국회 의석 나눠먹기 제도나 다를 바 없다. 국민의힘에 영남은 ‘공천이 곧 당선’인 지역이다. 이런 지역에선 국민이 아니라 당의 유력자들이 의원을 선택한다. 선거와 의회정치 과정이 왜곡될 수밖에 없다. 당원과 일반유권자에 의한 오디션 방식, 그게 너무 어렵다면 일단은 중앙당과 지역협의회가 공천권을 분점 혹은 공유하는 체제로 전환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추진하는 게 바람직하다.
다만 인 위원장의 말에 선후가 바뀐 부분이 있다.
국회의원은 국민대표이지만 지역대표·정당대표의 지위도 갖는다. 그 점에서 호남 사람은 호남에, 대구 사람은 대구에 출마하는 게 자연스럽다. 문제는 호남에선 더불어민주당 후보만, 대구에선 국민의힘 후보만 당선되는 현상이다. 호남에서 우파적 성향을 가진 정치인이 많이 나오고, 대구에서 좌파적 성향을 가진 정치인이 많이 나오는 쪽으로 정치지형이 바뀌어야 한다. 이는 우리 대의민주정치 성숙의 선결과제이기도 하다. 다만 1개 정당의 노력만으로는 어림없다.
국민의힘이 넘어야 할 산은 이뿐이 아니다. 당의 대표 스타인 윤석열 대통령의 독주(獨走; 독선, 독단까지는 아닌 것 같지만)에 이끌려가는 모습을 탈피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지난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때 국민의힘 지도부와 후보가 합창하듯 강조한 것이 “힘 있는 여당 후보”였다. 이 구호가 오히려 감표 요인이 됐다는 걸 지금쯤은 깨닫고 있을 것이다. 대통령의 권력과 권위로부터의 독립과 자립이야 말로 국민의힘이 서둘러 확립해야 할 위상이다.
중앙당 독점 공천제로는 안 된다
여당과 정부가 긴밀한 협조 관계를 갖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지휘권·결정권을 대통령실에 넘겨버리는 인상을 주는 것은 정치포기나 다름없다. 당은 주체적 정치집단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게 잘 안 된 바람에 공천 때마다 대통령과 당 사이에 긴장이 조성되고 혁신의 이름으로 이른바 ‘학살공천’이 자행되곤 했다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물론 지난 2020년의 21대 총선은 경우가 좀 달랐다. 강력한 당 장악력을 과시하고자 한 황교안 당시 당 대표, 그해 1월의 자유한국당 연찬회에서 “긴 말 필요 없다. 지금은 죽기에 딱 좋은 계절이다”라고 일갈한 바 있던 김형오 공천관리위원장이 경쟁적으로 공천을 망쳐먹었다. 경천동지할 공천개혁을 이뤄낼 듯이 기염을 토했던 김 위원장은 불공정 논란 속에서 사퇴해 버렸다. 한마디로 전장에서 도망간 것이다. 황 대표는 애걸복걸해서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비대위 대표를 모셔와 총괄선대위원장에 앉혔으나 당은 참담하게 패배했다. 황 대표는 책임진다는 명분으로 대표직과 함께 패배의 책임을 던져버렸고, 김 위원장은 참패 당한 장수로서 되레 비상대책위원장직에 올랐다. 그것도 한껏 뻐기면서….
지금 국민의힘에 필요한 것은 위기의식과 절박함의 공유다. 개인적으로는 윤 대통령이 더할 수 없이 시원하게 대통령직을 수행한다고 보지만 지나친 자신감으로 인한 ‘독주의 덫’에 걸려 버린 인상이다. 그리고 여당인 국민의힘은 무기력증까지 겹쳐서 21대 총선의 악몽에 시달리는 처지가 됐다.
우왕좌왕하다가 최후의 돌파구로 생각해낸 것이 혁신위원회이고, 파란 눈의 한국인 인 위원장이다. 비대위 체제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혁신위라도 제대로 잘 운영해서 국민이 놀라워할 만한 성과를 낸다면 기사회생할 수도 있다. 혁신위는 과감하되 진지하고 정교한 혁신 프로그램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준석 전 대표나 홍준표 대구시장이 징계를 풀어준다니까 되레 거부·조롱으로 대응하던데 의욕은 참신했으나 일의 선후를 감안치 못한 탓이라고 할 수 있다. 인 위원장에게는 좋은 교훈이 되었을 것이다.
김기현 지도부는 혁신위를 요령껏 다뤄서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결론을 유도하겠다는 의도를 혹시라도 가졌다면 바로 내버려야 옳다. 정치쇼로서의 혁신은 국민의 불신과 조소만 살 뿐이다. 대통령실은 총선에서 패배할 경우 바로 레임덕에 떨어지는 것은 물론 ‘이재명 차기 대통령’이라는 구호와 조롱에 시달리게 되리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이기는 길은 여당의 정치동력을 당 스스로 강화할 수 있도록 후원하고 지켜봐주는 것이다. 혹시라도 공천에 개입하려 할 경우 그게 정권 전체를 패배의 수렁으로 밀어 넣는 요인이 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글/ 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