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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을 때리는 '늦가을 습격사건' [D:쇼트 시네마(60)]


입력 2024.01.07 08:25 수정 2024.01.07 08:25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박지호 감독

OTT를 통해 상업영화 뿐 아니라 독립, 단편작들을 과거보다 수월하게 만날 수 있는 무대가 생겼습니다. 그 중 재기 발랄한 아이디어부터 사회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메시지까지 짧고 굵게 존재감을 발휘하는 50분 이하의 영화들을 찾아 소개합니다. <편집자주>


늦은 밤, 아파트 단지 앞에 세 남녀가 모여있다. 이들은 몇 달 동안 아르바이트 비를 정산 받지 못해, 고용주를 납치하겠다는 비장한 계획을 세웠다. 가장 나이가 많은 도빈(강석원 분)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다.


한 가정의 가장인 도빈은 돈 한 푼이 급하다. 아라(이유리 분)도 해외 배낭여행을 계획했기에 아르바이트비를 하루 빨리 받고 싶다. 월세가 몇 달 치 밀린 도빈(강석원 분)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집 주인에게 벌레 취급까지 받고 있다.


드디어 귀가하는 고용주 정자(김안나 분)과 마주쳤다. 이들은 정자를 둘러싸고 아르바이트 비를 달라고 독촉하지만, 오히려 뻔뻔스러운 정자의 수에 말려든다.


급기야 도빈은 납치할 계획까지 세웠다고 협박하고, 정자는 이를 모두 녹음한 휴대전화를 내밀며, 경찰서에 가겠다고 역으로 큰소리를 친다.


결국 도빈과 재민은 무릎을 꿇고 신고는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아라는 이 상황이 기가 막히지만 정자의 기세에 눌리고 만다. 정자는 경찰서에 신고하지 않는 대신, 지갑에서 꺼낸 오만 원짜리 지폐 몇 장으로 대신하려고 한다.


정자가 떠난 세 사람의 마음이 무겁다. 도빈은 자신이 받은 돈을 재민과 아라에게 나눠주 복잡한 표정으로 자리를 떠난다.


사실 이 계획은 도빈이 혼자 짠 것이 아닌, 고용주 정자와 함께 세웠다. 정자는 가장 돈이 급해 보이는 도빈을 꼬드겨, 아르바이트를 주지 않을 심산으로 판을 짰다. 대신 도빈에게만 월급을 모두 정산해 주기로 했다. 돈을 받았지만 양심을 판 도빈의 어두운 표정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당연하게 받아야 할 밀린 월급을 받기 위한 아르바이트 생들의 눈물 겨운 상황이 블랙 코미디처럼 엮여있다. 어쩐지 자꾸만 계획을 재촉하는 도빈과 그 뒤를 따르는 어리숙한 청춘 유리와 재민. 분위기를 선동하고 정자에게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는 도빈에게 가여운 청춘 둘은 의심 한 번 하지 못한다. 아무거도 모른 채 웃으며 받은 돈으로 맛있는 걸 사 먹으러 떠난다.


어쩌면 가장 가여운 건 도빈 아닐까. 비록 월급은 받았지만 마음 속에 거리낌 없는 유리와 재민과 달리, 도빈에게 이 사건은 껌처럼 달라붙어 언제 어디서든 죄책감과 자기혐오, 수치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야말로 양심을 일격하는 '늦가을 습격사건'이다. 자신이 받은 돈을 동생들에게 건네고, 월급을 받았음에도 쉽게 편해지지 못하는 그의 표정이 서글프다. 러닝타임 21분.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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