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통상 압박에 직면할 EU
EU 협상 방식 = 순응과 맞대응
韓 강점 활용한 타협 방법 강구해야
이번 달 1일로 유럽연합(EU)의 폰데어라이엔 2기 집행위원회가 출범했다. 5년 전 폰데어라이엔은 '유럽 그린딜'을 통해 탄소중립을 선언했다. 당시 EU는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무역 조치로 인해 발생한 갈등을 겪었지만 기후변화 대응에서 국제적 리더십을 발휘하겠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반면에 첫 임기 동안 코로나19 팬데믹, 영국의 EU 탈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 굴곡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며 EU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그 결과 재선이 가능했다.
이번 EU 집행위원회는 공교롭게 미국의 트럼프 2기 행정부와 거의 동시에 출범한다. 트럼프 2기는 이른바 '뭐든지 바이든과 반대로(ABB: Anything But Biden)' 양상을 띨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가치 기반의 연대라는 이름으로 협력했던 미국-유럽 관계에도 변화가 자명하다.
우선 유럽의 안보 문제가 급선무이다. 트럼프는 나토(NATO)를 유럽 국가들이 미국의 국방력을 이용해 안보를 보장받는 도구로 간주하여, 그 가치를 축소하고 있다. 또한 기후 변화 문제에서도 양측의 입장을 극명히 엇갈린다.
트럼프는 기후변화를 부정하고 셰일 오일과 가스 등 미국 에너지 산업의 부흥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 폰데어라이엔은 '그린딜에 후퇴는 없다'라고 선언하며 계속 탄소중립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무역 문제도 주요 갈등 요소다. 트럼프는 모든 국가에 10~20%의 보편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언했다. 문제는 EU의 대미 무역흑자가 상당히 크다는 점이다. 2023년 흑자는 약 1567억 유로이며, 올해에는 흑자 폭이 더 커질 것이다. 따라서 트럼프 2기의 압박은 중국뿐만 아니라 EU에도 향할 것이다.
독일 Ifo 연구소에 따르면 미국이 EU에 수입 관세 20%를 부과한다면 독일의 대미 수출은 15% 감소할 것이며, 약 330억 유로의 손실이 발생할 것이다. 반면 EU와 미국 간 무역의 60%는 대서양 양쪽 기업 간의(intra-firm) 무역으로 이루어질 정도로 공급망은 깊이 얽혀 있다.
그렇다면 관세를 활용한 미국의 압박에 대해 EU는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첫째, 협상의 방법으로 미국산 제품의 수입을 확대할 수 있다. EU는 이미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를 줄이는 과정에서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와 원유 수입을 대폭 늘렸다. 이러한 미국산 에너지 수입을 더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한편 미국산 방위물자의 수입을 확대하는 방안도 대미 무역 불균형을 완화하는 카드로 거론되고 있다. 이 방안은 트럼프가 종용해 온 나토 회원국들의 국방비 증액을 촉진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둘째, EU가 보복 조치로 맞대응할 가능성도 있다. 과거 트럼프 1기 행정부의 보호무역 조치에 대해 EU는 보복 관세를 부과한 바 있다. 특히 접전 주(Swing states)의 주력 산업에 대해 관세를 부과한다면 미국 내 정치적 분열을 일으킬 수 있고 2년 후 있을 미국의 의회 선거에 영향을 줄 수 있다.
EU 집행위원회는 이미 보복이 가능한 품목을 선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U는 최근에 무역 방어를 위한 법적 도구인 '통상위협 대응조치(ACI)'를 도입했다. 이 법안은 특정 국가가 무역이나 투자 조치로 EU를 압박할 경우, EU가 경제적 보복을 가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이 조치가 트럼프 1기 시절 무역확장법 232조를 활용한 관세 부과를 계기로 고안된 정책이다.
셋째, EU는 미국을 WTO에 제소할 수 있다. 반면에 항소기구가 사실상 무력화된 상황에서 제소를 통해 실질적 해결책을 얻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EU는 이를 통해 다자무역 체제를 지지하는 이미지를 강화하고, 트럼프 행정부의 일방적 조치를 비판하는 국제 여론전을 펼칠 수 있다. 다자주의 기구에서 지지를 확보하는 전략은 EU가 오랫동안 효과적으로 활용해 온 방법이다.
EU는 미국과 협상을 준비하며 경제적 손익 계산을 넘어 정치적 전략까지도 고려하고 있다. EU의 전략과 선택지는 한국이 대미 통상정책을 설계하는 데 중요한 참고 사례가 될 수 있다. 한국은 반도체, 전기차, 조선 등에서 글로벌 산업을 주도하는 국가다.
'4강'에 둘러싸인 지리적 위치와 북한 문제는 도전 요인이 될 수 있지만, 그만큼 전략적 가치 또한 크다. 단순히 양보한다는 생각에 머무를 필요는 없다. 한국 역시 협상과 대응의 균형을 정교하게 설계해야 할 시점이다.
글/ 강유덕 한국외국어대학교 Language & Trade 학부 교수(유럽연합(EU) 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