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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 김형주 감독 "“정답 없는 인생, 각자의 바둑을 두며 사는 것" [D:인터뷰]


입력 2025.04.13 10:16 수정 2025.04.13 10:16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개봉 후 18일째 박스오피스 1위

영화 '승부'는 촬영을 마친 뒤 코로나19 팬데믹과 주연 배우 유아인의 마약 혐의 논란 등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개봉까지 4년이 걸렸지만, 개봉 후 18일째 박스오피스 1위를 지키며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김 감독은 대한민국 바둑사의 전설 조훈현과 그의 제자 이창호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승부'를 통해 흑백의 바둑판 위에 펼쳐지는 스승과 제자의 승부, 그 너머의 감정과 관계의 밀도를 통해 결국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바둑판을 앞에 두고, 자기만의 바둑을 두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김형주 감독은 전작 '보안관'에 이어 '승부'도 영화 제작사 월광의 윤종빈 대표와 함께 했다. 김형주 감독은 윤종빈 감독의 아내로부터 조훈현과 이창호의 사제 대결을 영화의 이야기를 듣고 '승부'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윤종빈 대표 와이프가 제 학교 후배예요. 이창훈, 조훈현 기사님들의 이야기가 재미있으니 한 번 해보라고 남편에게 알려줬는데 당시 윤 감독님은 '수리남' 촬영 중이었고, 전 차기작을 찾고 있었어요. 너무 드라마틱한 이야기와 엄청난 감정들이 있는 이야기라 흥미로워서 제가 한번 해보겠다고 했죠."


김형주 감독은 바둑을 단지 한 판의 승부가 아닌, 그 시절만의 정서와 가치가 녹아 있는 삶의 은유로 보고 싶었다.


"지금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둑의 본질에 더 가까웠던 시대였어요. 그래서 시대의 낭만을 담고 싶었죠. 바둑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가치들이 세상이 급변하며 희미해진 부분이 있는데 그것도 같이 공유해 보고 싶었어요."


바둑은 룰이나 흐름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종목이다. 장면 속 승부의 긴장감은 충분히 전달되지만, 정확한 수의 의미나 판세를 일반 관객이 따라가기엔 한계가 있다. 김형주 감독은 그런 바둑의 특성을 인지하고,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했다


"사실 바둑을 몰라도 볼 수 있다는 원칙을 세웠지만 대본을 쓰고 콘티 작업을 하면서도 이 정도면 괜찮을까 스스로 의구심이 생겼어요. 전혀 못 따라오면 어쩌지 하던 차에 크랭크인을 앞두고 넷플릭스 '퀸즈캠빗' 시리즈가 오픈 됐어요. 보면서 이 정도면 나도 체스를 모르지만 이야기를 따갈 수 있었으니 우리 영화는 괜찮을 것 같았죠. 그런데 첫 블라인드 시사 때 못 따라갈 정도는 아닌데 의미를 알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겠다란 의견들이 있어서 자막 등을 활용하면 정보를 가진 채로 감상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실존 인물을 다루는 만큼, 제작진은 당사자들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였다. 특히 조훈현 기사는 바둑이라는 종목의 본질이 왜곡되지 않기를 바랐다.


"조훈현 기사님은 처음이 바둑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고 하니 바둑이 축구나 격투기처럼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지 않은데 어떻게 끌어나갈 수 있을지 우려하셨어요. 또 배우들이 바둑알 기본 그대로 잡기를 원하셨어요. 기존 바둑을 소재로 했던 영화들에서 액션이 함께 쓰이면서 폭력적인 것들이 있어서 이번엔 폭력적이지 않았으면 하셨어요. 그 두 가지를 당부하셨습니다."


'승부'는 이창호의 눈부신 천재성을 조명하는 이야기로도 충분히 전개될 수 있었지만, 김형주 감독은 이 작품의 중심을 조훈현이라는 인물에게 두고 싶었다. 스승이자 전설적인 바둑 기사를 재조명하는 차원을 넘어, '정상 이후'를 다루는 서사에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이창호의 관점에서 보면 전형적인 천재의 성장 서사로 풀 수 있지만, 조훈현이라는 인물에게 이야기의 무게중심이 실릴 수밖에 없는 이유도 분명합니다. 정상에 올랐다가 바닥까지 떨어지는 경우 대부분은 사라지기 마련인데, 그는 그걸 극복하고 다시 정상에 도전하거든요. 초반에는 이창호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는 듯하지만, 처음으로 스승의 역할을 해보는 조훈현이 겪는 착오와 그 속에서 얻는 깨달음, 즉 또 다른 성장의 레이어도 분명 존재합니다. 배제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두 사람 사이에 대결이 벌어지고, 스승이 패하면서 감정의 소용돌이가 시작되지만 결국 극복하죠. 그리고 다시 도전하는 스승의 서사가 이어집니다. 구조적으로도 그런 밸런스를 많이 고민했고, 특히 스승의 감정선에 방점을 찍으려 했습니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그런 미묘한 감정을 어떻게 전달할지 깊이 고민했습니다."


실존 인물을 다룬 영화에서 항상 따라오는 고민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상상인가'에 대한 경계다. 김형주 감독 역시 '승부'를 연출하며 실제 사건의 흐름과 극적 감정선을 어떻게 조화롭게 구성할지 고민했다.


"실제와 영화 사이에는 어느 정도 상상력이 가미됐습니다. 조훈현 기사님 말씀에 따르면, 이창호에게 뭔가를 가르쳤다기보다는 훈육 같은 건 전혀 없었고, 복기할 때 마주 앉아보는 정도가 전부였다고 해요. 어린 제자가 바깥에서 혼자 스스로 성장한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영화는 조금 더 극적인 효과를 위해 실제 있었던 사건의 연대기나 타임라인을 일부 비틀었습니다. 예를 들어, 영화에서 스승과 제자가 처음 만나는 장면은 마치 그 순간 이창호를 제자로 삼는 것처럼 그려지지만, 실제로는 이미 제자가 된 이후였고, 그 후에 세계 대회 우승을 한 것이죠. 또 영화에서는 스승이 제자에게 처음으로 지는 대국처럼 연출했지만, 실제로는 그전에 두 번의 대국이 있었고, 그땐 이창호 국수가 일방적으로 패했어요. 하지만 영화적으로는 스승이 세계 최정상에 올라 있는 시점에 어린아이를 받아들이는 설정이 더 인상적이고, 감정적으로도 효과적일 거라 판단했던 거죠."


'승부'의 중심에는 이병헌, 유아인의 강렬한 연기 대결이 있다. 조훈현 역의 이병헌, 이창호 역의 유아인은 캐릭터만큼이나 상반된 연기 스타일과 에너지를 지닌 배우들이다. 김형주 감독은 이 대비를 의도적으로 활용해 인물 간의 간극과 긴장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자 했다.


"이병헌 배우와 유아인 배우는 연기 스타일 자체가 완전히 다르고, 각자만의 뚜렷한 매력을 가진 배우들이죠. 영화 속 인물들도 성격과 에너지가 확연히 다른 두 캐릭터인데, 캐스팅 과정에서도 그런 대비를 고려했어요. 이병헌 배우를 먼저 캐스팅하고, 이후에 이창호 역을 누구에게 맡길지를 고민했죠. 영화 바깥에서도 두 배우 사이의 뚜렷한 결 차가 느껴지면 더 근사하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이병헌이라는 강한 존재감에 눌리지 않으면서도, 외모부터 연기 톤까지 서로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마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지금도 잊히지 않는 순간이 하나 있는데, 본 촬영 얼마 전에 테스트 촬영을 했어요. 가벽 하나 세워두고 두 배우가 헤어 분장을 한 채 카메라 앞에 섰는데, 그 순간 숨이 막힐 정도로 근사했어요. 그 장면을 보며 ‘이 조합은 정말 특별하다’는 걸 직감했죠. 실제 촬영에 들어가서도 매 순간이 만족스러웠고, 보는 내내 배부를 정도였어요."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장면은 단연 두 기사의 대국이다. 단순한 바둑 경기가 아니라, 인물의 감정선과 관계의 흐름이 응축된 드라마의 정점이기 때문이다. 김형주 감독은 이 장면들을 단순한 승부가 아닌 심리전으로 설계하며, 시각적‧감정적 밀도를 모두 끌어올리는 데 공을 들였다.


"영화의 두 대국은 서사의 축이자 분기점이라 할 수 있는데, 첫 대국은 감정적으로 굉장히 처절한 시퀀스로 접근했습니다. 미술적으로도 그런 방향을 강조했어요. 미술감독님께 이 장면은 마치 링처럼, 케이지가 있는 격투장 같은 공간이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고, 색감부터 시작해 전체 디자인을 그렇게 잡아갔습니다. 당시 이창호 캐릭터가 감정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다 결국 감정이 폭발하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그 혼란과 폭발을 시각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공간이어야 했죠. 그래서 실제로 세트를 지었고, CG를 최대한 배제했습니다. CG로 표현하면 이질감이 생길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후부터는 조훈현의 고뇌와 절망을 표현하기 위해 조명의 움직임이나 바둑돌 그림자까지도 감정에 맞춰 섬세하게 조율했습니다. 반면 마지막 대국은 서로가 성장한 뒤에 마주한 대결이라, 편안한 마음으로 바둑을 즐기는 듯한 톤을 원했습니다. 스포츠 중계처럼 박진감 있고 리듬감 있게, 음악도 그런 방향으로 구성했어요. 실제 고증과는 조금 다르지만, 캐스터도 섭외해 현장감을 살렸고, 전반적으로 경쾌하면서도 긴장감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많이 고민했습니다."


긴 제작 기간, 외부 변수, 그리고 오랜 기다림. '승부'는 김형주 감독에게 많은 감정이 담긴 영화다. 화려한 소재도, 시대의 트렌드도 아닌 이야기의 힘을 믿고 개봉까지 끌고 온 그에겐, 이 작품 자체가 하나의 '승부'였을지도 모른다.


"자극적인 소재가 아님에도 동의해 주시고 투자까지 이끌어낼 수 있었고, 훌륭한 배우들과 스태프들과 함께 작업할 수 있어 정말 기뻤습니다. 창고 영화라는 말도 있었지만, 이 작품은 몇 년간의 유행이나 트렌드를 따르는 이야기가 아니라 쉽게 휘발되지 않을 이야기라고 생각했기에 전혀 후회는 없습니다. 넷플릭스로 공개하기로 결정된 이후, 스케줄이 가능한 배우들과 함께 극장을 단관해 영화를 본 적이 있어요. 그날의 기억이 참 좋았고, 함께한 분들이 진심으로 좋아해 주고 응원해 줘서 큰 힘이 됐습니다. 이후 극장에서 정식 상영 및 개봉이 결정됐을 때도, 함께한 동료들이 서로 축하해 주며 따뜻한 분위기를 나눴고요.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그런 일련의 과정을 함께한 것 자체가 큰 의미로 남아 있습니다."


김형주 감독은 '승부'를 통해 단순한 스포츠 서사를 넘어서, 삶에 대한 은유를 담아내고자 했다. 바둑이라는 고요한 승부의 세계 안에 담긴 감정, 관계, 태도, 그리고 인간다움을 통해, 그는 관객 각자의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질문을 던진다.


"처음 초고를 쓸 때부터 머릿속에 맴돌던 말이 ‘창호야, 또 너냐’였어요. 그리고 ‘복기’라는 행위야말로 바둑을 상징하는 요소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스포츠에서 승자와 패자가 경기 후에 마주 앉아, 처음부터 다시 그 승부를 되짚어보는 경우가 있을까요? 그런 점에서 바둑은 정말 품격 있는 스포츠라고 느꼈어요. 사실 우리 모두는 일상 속에서 저마다의 바둑판을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속 인물들처럼 인생에 정답은 없고, 결국 중요한 건 각자가 자기만의 바둑을 두면서 살아가는 거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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