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태 친일-부정부패 의혹 공방 진실은...
박근혜 후보 정수장학회 기자회견서 언급…"동척 식산 통해 부 축적"
이정현 "노무현 전대통령이 부일장학생" 유족 "사자명예훼손 고소하겠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후보와 관련해 논란이 일고 있는 정수장학회 문제의 당사자인 고(故) 김지태 씨의 과거 행적에 눈길이 쏠리고 있다. 새누리당은 김씨의 과거 행적이 보도된 기사를 조목조목 따지며 민주통합당이 당시 재벌을 비호하고 있다고 반격에 나섰다.
반면 김 씨의 유족들은 이에 대해 “상식 밖의 이야기”라며 박 후보를 직접 언급하며 사자(死者)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고 밝혀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박근혜가 바라본 김지태 누구인가?
김씨는 박 후보가 21일 기자회견에서 밝혔듯이 부정축재자로 지목당한 적이 있는 데다 일제 강점기 친일 의혹도 도마 위에 오르고 있는 상태다.
박 후보는 전날 정수장학회와 관련한 기자회견에서 김씨에 대해 “안타깝게도 당시 김 씨는 부정부패로 많은 지탄을 받은 분이었다. 4ㆍ19때부터 부정축재자 명단에 올랐고 그 후 5ㆍ16때 부패 혐의로 징역 7년을 구형받기도 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박 후보는 그러면서 “그 과정에서 처벌받지 않기 위해 먼저 재산헌납의 뜻을 밝혔고, 부산일보와 문화방송 주식 등을 헌납한 것”이라고 말했었다.
부 축적 과정에서 동척과 식산은행의 도움받아
1908년 부산 출신인 김 씨는 1927년 부산상고의 전신인 부산제2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동양척식회사(동척) 부산지점에 입사했다. 동척은 일제가 식민지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설립한 회사다.
김 씨는 1932년경 폐결핵으로 동척을 그만두게 된다. 김씨는 이에 일본인인 동척 부산지점장을 설득해 울산 교외에 동척이 소유하고 있는 농장 2만평을 불하받는다. 10년 연부상환 조건이었지만, 울산의 농장이 옥토였던 탓에 1년에 연부를 물고도 쌀이 100석이 남을 정도였다고 한다.
여기서 돈을 번 김 씨는 1934년 부산진직무공장을 인수했다 실패한다. 김 씨는 다음해인 1935년 조선지기를 설립했다. 조선지기는 식산은행으로부터 융자를 받아 설립했다. 이 과정에 김 씨와 바둑친구였던 일본인 식산은행 부산지점장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식산은행은 조선총독부의 산업정책을 금융측면에서 뒷받침했던 핵심기관 중 하나로, 일제 수탈에 있어 동척과 함께 중요한 축이었다.
이후 중일전쟁이 발발해 지기가 군수품으로 납품되면서 김 씨는 엄청난 부를 쌓게 된다. 김 씨는 당시 울산은 물론 경주, 동래와 김해에 방대한 농토를 사들여 목산농장을 설립했다. 김 씨는 또 당시 부동산 사업에도 손을 댄다. 일본인들의 도움과 전쟁 수혜를 통해 막대한 부를 얻은 김씨는 1943년경엔 부산에서 호별세(戶別稅) 납부 제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김 씨는 1943년 일본인이 경영하던 조선주철공업합자회사를 인수했으며 1949년 적산(敵産) 기업이던 아사히견직(조선견직주식회사의 전신)의 관리인을 맡게 된다. 또 1954년 신발제조공장으로는 당시 전국 최대 규모였던 삼화고무를 인수해 전국 10대 재벌의 반열에 오른다.
이로 인해 일제 강점기 김 씨의 부 축적과정에 대해선 곱지 않은 시각이 적지 않다.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했는지는 명확하진 않지만, 적어도 일제의 수혜를 입고 상당한 부를 쌓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김 씨의 전기 간행위원회가 펴낸 김씨의 평전 ‘문항라 저고리는 비에 젖지 않았다’는 “민족의식이 누구 못지않았던 자명이 동척에 입사했다는 것이 썩 유쾌한 일이 아닐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다”고 밝히고 있다.
부정축재의 꼬리표?
김 씨에겐 ‘부정축재’의 꼬리표가 달려 있다.
김 씨는 이승만 정권 시절인 1958년 8월 치안국으로부터 김 씨가 운영하던 조선견직회사에 대한 압수수색을 당한다. 당시 언론 기사에 따르면, 김씨는 약 30억환에 달하는 영업세와 소득세, 물품세 등을 포탈한 혐의를 받은 바 있다.
김 씨는 또 1960년엔 조선견직의 탈세사건 무마를 위해 이승만 정권 붕괴 직전 부통령을 역임한 이기붕 씨에게 불법정치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60년 6월1일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김 씨는 3.15 부정선거 당시 자유당에 정치자금을 제공한 55개 기업주들 가운데 21번째로 많은 5000만환을 헌금한 것으로 돼 있다.
이에 대해 당시 김 씨는 “1959년 8월에 부산일보 탄압을 목적으로 탈세 운운해 조사를 받은 일은 있지만 탈세 묵인조로 자유당에 정치자금을 바친 사실은 없으며, 더구나 3.15 부정선거자금을 낸 사실이 없다”고 결백함을 주장했었다.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김 씨는 부정축재 자진신고 기간에 신고했다. 당시 자진신고엔 김 씨를 비롯해 이병철 제일모직 사장 등 44명과 공무원 13명 등 57명이 신고했다.
<동아일보> 1961년 12월31일자 기사에 따르면,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 부정축재처리위원회는 부정축재 환수액 통고분에 대한 이의신청을 접수한 후 최종 통고액을 결정했다. 김 씨는 당초 9억2000만환에서 4억환으로 감소됐다. 일각에선 당시 김씨가 5억5000만환 정도의 통고액을 납부한 것으로도 알려지고 있다.
그러다 김 씨는 1962년 4월 부정축재와 재산도피 등의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구속됐다. 중정 부산지부는 그에게 부정축재처리법, 외국환관리법, 농지개혁법 위반 등 9개 혐의를 적용했다. 당시 김 씨의 부인인 송모 씨는 윤전기를 구입하러 서독에 갔다가 7캐럿짜리 다이아반지를 밀수했다는 혐의를 받고 먼저 구속되기도 했다.
당시 5월 18일자 동아일보 기사에서 김 씨는 “윤전기를 사러 서독에 가서 1만 달러를 썼지만 정상적인 지출로 해외에 재산을 도피하지 않았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경남지구 계엄고등군법회의는 같은 달 25일 징역 7년을 구형했다.
이정현 "민주당이 언제부터 재벌 대변자가 됐느냐"
MBC와 부산일보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었던 부일장학회와 부산에 소재한 땅 10만평을 헌납한 김 씨는 박정희 정권 시절에도 “실크재벌”로 불릴 정도로 성공가도를 달린다.
조선견직과 한국생사, 삼화고무 등을 중심으로 기업의 세를 확장시켰고, 이후 삼화그룹을 만들어낸다. 1973년엔 증권업계 5위권의 동방증권을 인수해 기업공개에 박차를 가하기도 했다.
정수장학회측은 최근 김 씨 유족들과의 소송에서 “김 씨는 재산 헌납 이후 정부로부터 해외차관, 은행차입 등에서 많은 혜택을 받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와 관련, 이정현 새누리당 공보단장은 22일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일제시대, 이승만 정권 시절 등 김 씨의 과거 행적이 보도된 기사를 조목조목 언급한 뒤 “민주통합당이 언제부터 이런 분의 대변자가 됐느냐”며 “1935년부터 62년까지 부정적 의미에 있어 언론에 보도된 행적을 다 점검하고, 자신들의 정체성과 김 씨를 비호하고 대변하는 이유를 국민들에게 우선적으로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단장은 “김 씨는 1962년도에 풀려난 뒤에도 사업을 잘해서 굉장히 번창했다”면서 “그것으로 해서 그 분이 망하거나 그런 게 아니다”고 했다.
그는 “민주당은 당시 한 재벌에 대한 대변과 감싸기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며 “민주당이 오늘 오후라도 김씨의 행적과 행보에 대해 그것을 대변하고 비호하는 정당이라고 선언하는 순간, 저는 대한민국 정치에서 깨끗이 얼굴을 지우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는 또 “꼭 그렇다고 보진 않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 씨의 인연을 들먹이지 않을 수 없다. 노 전 대통령은 부일장학회의 수혜를 받았고 김씨와 관련된 100억대 넘는 소송 참여했다”며 “도대체 문 후보는 무슨 인연을 갖고 이 분을 비호하고 감싸는 정당의 모습 보이고 있느냐”라고 따져물었다.
유족들 "김지태 부정부패자? 사자 명예훼손"
한편, 김씨의 유족들은 전날 박 후보가 김씨의 ‘부정부패’ 등을 거론한 데 대해 각종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상식 밖의 이야기”라며 박 후보를 사자(死者)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고 밝혔다.
김씨의 5남인 김영철 씨는 이날 <데일리안>과 통화에서 선친의 친일 의혹 제기와 관련, “아버님은 일제 때 동척에서 일한 죄밖에 없다. 그것도 취직해서 금방 나왔다”며 “친일로 치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만주군관학교에 가서 만주군 소위로 독립투사들을 토벌하지 않았느냐. 친일로 치면 박 전 대통령이 더 그렇다”고 반박했다.
김영철 씨는 “부친은 독립운동가였던 신익희 선생과 친했다. 아버님의 호인 ‘자명’도 신 선생이 지어준 것이다. 아버님이 친일을 했다면 신 선생이 아버님과 친했겠느냐”면서 “또 어떤 친일사전에도 아버님의 이름은 없다. 이것은 (정수장학회를) ‘물타기’ 하려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이와 관련, 김 씨의 3남인 김영주 씨는 지난 2004년 김씨의 친일 의혹의 불거졌을 당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동척 입사는 본인이 선택한 게 아니라 당시 학교에서 성적순으로 정해준 것"이라며 "5년간 근무하고 25살에 그만 뒀다. 동척 전답 2만평 불하도 10년 연부상환 조건으로 받은 것이다. 그 땅은 나중에 아버지가 직접 영농을 했다"고 밝혔다.
김영주 씨는 또 "바둑 등을 통해 인간적으로 친해진 일본인 상급자나 제자를 사랑한 일본인 은사가 도와준 것을 밝힌 자서전 내용을 문제삼는다면 도대체 친일 기준을 어떻게 설정할 것이냐"며 "선친은 평소 일본인과 경쟁해서 이겨야겠다는 의지가 사업의 원동력이 됐다는 말씀을 자주했다"고 부연했다. 그러면서 김 씨는 친일 의혹 제기에 대해선 "다분히 흠집내기이자 의도적"이라고 반박했다.
김 씨의 차남 김영우 씨도 전날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 후보가 ‘김 씨는 부정부패로 많은 지탄을 받은 분이었다’고 말한 것과 관련, “상식적으로 고인의 명예는 지켜주는 것이 예의인데 사실도 아닌 것을 기반으로 고인을 혹평해서 얻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며 “사자 명예훼손으로 박 후보에 대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김영우 씨는 이어 “아버지 혼자 부정부패로 잡혔던 게 아니라 당시 유력 기업인 26명이 한꺼번에 부정축재자로 잡혀 들어갔다”면서 “처음부터 정권에 의한 희생이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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