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카카오톡
블로그
페이스북
X
주소복사

'외로운' 김정은, 빨치산 2세대에 충성요구하지만...


입력 2014.01.03 13:59 수정 2014.01.04 09:21        김소정 기자

고모부 장성택 처형 이후 입지기반 오히려 약화되기도

대다수 빨치산 출신 김일성 김정일 때 숙청되고 미미

북한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그의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한 이후 소위 ‘백두혈통’에 대한 ‘빨치산 혁명가’들의 충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하지만 북한에서 일찌기 항일 빨치산 혁명가는 김일성과 반대파라는 이유로 거의 숙청당했으며, 살아남은 이들은 김일성에 충성을 맹세한 수십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24일 대북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이 간부들에게 충성을 강요할 때마다 내세우는 빨치산 혁명가와 그 2세대들은 김일성 주석 때는 물론 김정일 국방위원장 때까지도 숙청 대상이었다.

대표적으로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1945년 김일성과 함께 입북한 박성철 전 부주석은 1953년 민족보위성(현 인민무력부) 정찰국장을 끝으로 군에서 물러났다. 이후 1976년 정무원 총리를 역임하고 1977년 부주석에 오르는 등 본인은 직위를 누렸지만 그의 자녀들은 요직에 등용되지 못한 채 서서히 사멸됐다고 한다.

박성철은 김정일 세습에 반대했던 대표적 인물이라고 한다. 소식통은 “박성철의 슬하에 아들 둘, 딸 하나가 있지만 이들은 부친이 부주석으로 있을 때까지는 연락소장 정도를 지내다가 이후 간부로 등용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소식통은 “이 밖에도 빨치산 출신 중 김정일 세습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실각되고 심지어 가족 모두가 15호 정치범관리소에 간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대표적으로 허봉학 군 총정치국장, 김창봉 민족보위상 등으로 이들이 개입한 1968년 ‘1.21 무장공비사건’이 실패하자 김일성은 그 책임을어 이들을 ‘군벌주의’로 낙인찍어 숙청시켰다.

당시 이들에게는 반당반혁명종파 혐의가 씌어졌고, 같은 빨치산 출신인 오진우 당 비서국 비서가 숙청을 지휘했다. 1969년 1월 열린 4차 확대전원회의에서 공개된 김창봉 일파에 대한 죄목 가운데 ‘군부 내에서 김일성 초상화와 석고상을 못 두게 했으며, 김일성을 찬양하는 노래를 승냥이 노래 같다고 비유했다’는 대목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실 김일성은 당초 빨치산 혁명가에 대해선 3대까지 입지를 보장하도록 교시를 내렸다고 한다. 빨치산 2세대들은 비록 공직에 못 올랐어도 모든 공급을 받고 최소 대령까지는 승진을 보장받도록 했다는 것이다.

결국 지금 북한에서 빨치산 2세대로 대접을 받는 사람들은 그의 부친인 빨치산 1세대가 김정일의 세습을 적극 지지하고 실제로 힘을 실어줬던 사람들인 셈이다.

대표적으로 최근 장성택 처형 시점에 사망한 김국태 당 검열위원장의 부친 김책 전 전선사령관이 김일성을 추대했고, 현 최룡해 총정치국장의 부친 최현 전 인민무력부장이 김정일을 추대한 인물로 꼽힌다.

고모부인 장성택을 숙청한 후 김정은은 이른바 빨치산 2세대들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고 있다. 최룡해는 대표적인 빨치산 2세대이기도 하다.(자료사진) ⓒ연합뉴스

김책은 중국 동북항일연군에서 김일성보다 직책이 위였고 연장자임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에게 충성을 다했다. 광복 이후 산업상과 내각 부수상을 거쳐 6·25전쟁 때 전선사령관을 지냈으나 전쟁 초기에 사망했다.

이런 아버지를 둔 아들 김국태는 소련 유학 이후 노동당 부부장 등을 거쳐 군 총정치국 부국장, 사회안전성(현 인민보안부) 정치국장 등을 역임하는 등 평생을 김일성은 물론 김정일의 각별한 비호를 받았다.

특히 김국태는 김정일이 노동부 선전선동부 부부장일 때 선전선동부 부장으로 있으면서 친분을 돈독히 했으며, 김정일 후계체제 구축에도 힘을 보탰다.

최현 전 인민무력부장은 1958년 종파사건 때 김일성에게 끝까지 충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북한 당국은 장성택 처형 이후 유난히 과거 최현이 김정일과 백두산을 함께 올랐을 때 김정일의 그림자를 밟지 않으려고 황급히 몸을 옮겼던 일화를 소개하며 빨치산 혁명가들의 충성심을 선전하고 있다.

지난 17일 김정일 사망 2주기 추모대회에서 고모 김경희 자리에 대신 앉은 94세의 황순희 조선혁명박물관 관장은 대표적인 여성 빨치산이다. 황순희와 그의 남편 류경수는 과거 김일성 주석, 김정일 위원장의 생모 김정숙 등과 함께 동북항일연군에서 항일 활동을 펼쳤으며 황순희는 북한에 생존해 있는 빨치산 1세대 3명 중 한명이다.

이 밖에 북한에서 중앙추모회가 열릴 정도로 추앙받고 있는 빨치산은 최광 전 인민무력부장, 림춘추 전 국가 부주석 정도이다.

현재 북한에서 고위간부로 등용된 빨치산 2세대의 선두주자는 단연 최룡해이다. 다음 오백룡 전 노동당 정치위원의 아들 오금철 총참모부 부총참모장, 오진우 전 인민무력부장의 아들인 오일정 당 민방위부장이 있다. 빨치산 3세대로 주목받고 있는 인물은 김국태의 딸과 사위인 김문경 당 국제부 부부장과 이흥식 외무성 국장이다. 최룡해의 아들인 최준,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손자 김성현도 당군정에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에 소식통은 김일성의 항일 투쟁으로 대표되는 ‘보천보 전투’에 대해 북한 간부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뒷얘기를 전했다. 김일성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 150여명이 일제의 전략상 요충지인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천보를 습격해 주요기관을 일시 점령해 경찰관 주재소 등 일제의 모든 기관을 태우고 일본인들을 처형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소식통은 “당시 이 전투에 참가했던 리종산이 폭로하기를 원정대는 150여명이 아니라 30여명에 불과했고, 당시 명확한 목표물을 정해서 진격한 것이 아니라 빨치산들이 위치 파악도 제대로 못한 상황에서 단지 먹을 것을 구하러 작은 삼림보호구를 습격했던 것에 불과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국내에서도 이 보천보 전투에 대해 당시 일본순사가 5명밖에 없는 작은 마을(인구 1300여 명)이라는 주장과 동명이인의 항일투사 김일성이 참가한 전투라는 설이 나와 있는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이 전투를 기리기 위해 일찍이 1937년 6월4일 ‘승리기념관’을 세운 것도 모자라 1955년 8월7일 보천보에 ‘보천보혁명박물관’을 지었으며 1967년 6월 양강도 혜산시에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까지 세워 김일성 우상화에 이용했었다.

이번에 장성택은 반당반혁명종파 혐의를 받고 전격 처형됐다. 이 혐의는 과거 빨치산 1·2세대들이 김정일의 후계를 반대한 이유로 숙청당할 때 받은 것으로 장성택도 당초 김정은의 세습을 탐탁치않게 여겼다는 일화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김정은은 24일 김정일 최고사령관 추대 기념일과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의 생일을 맞아 노동신문에 김정숙 동상 사진을 싣고 김정숙 띄우기에 집중하고 있다. 김정숙 동상은 항일 빨치산 활동 때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김일성에게 날아오는 총탄을 몸으로 막으며 일본군에게 권총을 쏘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어 빨치산 혁명가가 지켜온 백두혈통을 묘사하고 있다.

김소정 기자 (bright@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0
0
김소정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댓글 0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