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한 멘탈' 김연아도 4년 전보다 크게 긴장
'몸이 기억하는' 기술과 축적한 경험으로 극복
“올림픽 별거 아니네.”
‘피겨퀸’ 김연아(24)가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쇼트 프로그램에서 78.50점이라는 여자 싱글 사상 최고점으로 1위에 오른 직후 숙소로 돌아와 스태프들에게 했다는 말이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후 다시 선 '2014 소치 동계올림픽' 무대는 결코 김연아에게 별거 아닌 무대가 아니었다. 김연아의 연기는 변함없이 최고였지만 심리 상태는 4년 전의 그것과 전혀 달랐다.
김연아는 20일 오전(한국시각) 러시아 소치의 아이스버그 스케이팅 팰리스에서 열린 소치 동계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여자 싱글 쇼트 프로그램에서 뮤지컬 곡인 ‘어릿광대를 보내주오’에 맞춰 연기를 펼쳐 기술점수(TES) 39.03점, 프로그램 구성점수(PCS) 35.89점으로 합계 74.92점을 받았다. 지난 1월 국내서 열린 종합선수권에서 기록한 80.60점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작년 12월 골든 스핀 오브 자그레브(73.37점) 보다는 1.55점 높은 점수다.
김연아는 첫 점프 과제인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루프 콤비네이션 점프를 깨끗하게 성공해 기본점수 10.10점에 1.50점의 가산점을 받은 데 이어 두 번째 점프 과제인 트리플 플립에서도 기본점수 5.30점에 1.10점의 가산점을 받으며 6.40점을 얻었다. 마지막 점프 과제였던 더블악셀까지 성공, 기본점수 3.63점에 가산점 1.07점을 획득했다. 쇼트 프로그램 세 가지 점프에서 3.67점의 가산점을 얻은 셈이다.
점프 과제 외에 스핀에서는 플라잉 카멜 스핀(가산점 0.93점)에서 최고 레벨인 레벨4, 레이백 스핀에서 레벨3(0.79점)를 받은 김연아는 마지막 체인지 풋 콤비네이션 스핀에서 레벨4(1.07점)를 받았다. 다만, 레벨4를 노렸던 스텝시퀀스에서는 레벨3(가산점 1.14점)로 기본점수 3.30점을 받는데 그쳤다.
김연아에게 주어진 기술점수는 39.03점. 기술점수만 놓고 보면 작년 12월 골든 스핀 오브 자그레브에서 받았던 점수(38.37점)보다 다소 높다. 프로그램 구성점수에서도 김연아는 스케이팅 기술 9.04점, 트랜지션에서 8.61점, 퍼포먼스에서 9.11점, 안무(컴포지션)에서 8.89점, 음악해석에서 9.21점을 받아 35.89점의 프로그램 구성점수로 작년 골든 스핀 대회 당시 점수(35.00점)보다 1점 가까이 더 높았다.
하지만 연기를 마친 뒤 김연아가 짓는 미소에는 씁쓸함이 묻어났다. 키스앤크라이존으로 들어와 점수를 확인한 이후에서야 비로소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도대체 김연아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실 김연아는 연기를 펼치기에 앞서 같은 조(3조) 선수들과 아이스링크에서 연습을 하는 시간에도 표정이 밝지 않았다. 콤비네이션 점프 연습을 하기 위해 자리를 잡아야 하는 순간 다른 선수들과 동선이 겹치면서 쉽사리 점프를 시도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도한 점프를 모두 깨끗하게 성공시키면서 실전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 그리고 실전에서도 기대대로 최고의 연기를 펼쳤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연기를 마친 김연아 미소에서 씁쓸함이 배어 나왔다. 그 이유는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김연아에게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김연아는 연기를 마친 뒤“무슨 이유에서인지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프로그램 직전까지도 점프에 대한 자신감이 전혀 없었다. 긴장했던 탓인지..”라고 털어놨다. 그동안 김연아를 평가할 때 가장 큰 장점으로 꼽히던 부분이 ‘강인한 멘탈’이었음을 떠올릴 때, 김연아가 긴장 때문에 실전 당일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고 연기 직전까지 점프에 대한 자신감을 찾을 수 없었다는 말은 자못 충격적인 고백이었다.
4년 전 밴쿠버 동계올림픽 무대에서 김연아는 프리 스케이팅 연기를 모두 마친 뒤 아이스링크에서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팽팽했던 긴장감이 풀어진 이유 또는 ‘해냈다’는 성취감에 터진 눈물이었지만 연기를 앞두고 점프에 자신감이 사라질 정도로 긴장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4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그 4년이란 시간은 김연아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변화를 가져다 준 셈이다. 그럼에도 김연아는 이날도 무결점 연기로 최고의 선수임을 입증했다. 멘탈은 잠시 흔들렸지만 그동안 축적한 풍부한 경험이 주는 ‘몸이 기억하는’ 기술과 연기력으로 어려움을 극복했다.
이처럼 김연아가 연기 당일 스스로도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최고의 연기를 펼쳤음에도 이날 쇼트 프로그램 결과는 김연아에게 프리 스케이팅에서의 어드밴티지를 가질 수 없게 만드는 결과가 나왔다.
우선 아사다 마오(일본)는 첫 점프 과제인 트리플 악셀을 시도하다 넘어진 이후 리듬이 완전히 깨져 실수를 연발한 끝에 55.51점(TES 22.63점, PCS 33.88점, 감점 1점)의 저조한 점수로 우승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홈 어드밴티지를 앞세워 호기롭게 도전장을 내민 러시아의 율리아 리프니츠카야 역시 트리플 플립 점프에서 넘어지는 실수를 범하며 65.23점(TES 33.15점, PCS 33.08점, 감점 1점)이라는 부진한 성적표로 5위에 그쳤다.
여기까지만 보면 김연아의 동계올림픽 2연패는 기정사실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델리나 소트니코바(74.64·러시아), 캐롤리나 코스트너(74.12·이탈리아) 등 당초 우승 후보로 거론되지 않던 선수들의 예상 밖 선전으로 판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김연아로부터 3위까지는 불과 1점 차이도 나지 않는다. 20일 0시부터 열리는 프리 스케이팅을 사실상 동점인 상황에서 시작하게 되는 셈이다.
특히, 러시아의 소트니코바는 리프니츠카야의 부진한 쇼트 프로그램 점수로 홈팬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부담을 안은 상황임에도 특유의 유연하면서도 대담한 연기로 74.64점(TES 39.09점, PCS 35.55점)이라는 고득점에 성공, 김연아의 강력한 경쟁자로 떠올랐다.
4년 전 밴쿠버에서 김연아가 프리 스케이팅에 앞서 쇼트 프로그램에서 4.72점이라는 우위를 안았던 점을 떠올릴 때, 김연아는 이번 대회 프리 스케이팅에서는 앞선 올림픽과는 전혀 다른 상황 속에서 연기를 펼쳐야 하는 셈이다.
쇼트 프로그램에서의 ‘클린’ 연기가 김연아의 긴장을 어느 정도 해소시켰을지 알 수 없지만, 프리 스케이팅 연기를 앞두고 김연아는 또 한 차례 극도의 긴장감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다. 여자 싱글 피겨 스케이팅(경기시간 = 21일 3시46분경)에서 4년이라는 시간을 뛰어 넘어 동계올림픽 2연패에 도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피겨퀸' 김연아 모습에서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