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카카오톡
블로그
페이스북
X
주소복사

'세월호 비난' 북, 초등생 희생자 낸 룡천폭발사건 때...


입력 2014.05.11 10:28 수정 2014.05.11 14:39        김소정 기자

10년전 초등생 76명 등 1000여명 사상자 발생

남한 정보기관 연루된 김정일 암살기도사건 둔갑

수학여행길에 올랐던 안산 단원고 학생 수백명이 여객선 침몰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건에 대해 전세계가 안타까움을 표하는 가운데 정작 북한 당국은 “괴뢰정권의 반인민적 정책이 빚어낸 사건”이라며 비난했다.

하지만 북한에서 10여년 전 발생한 룡천역 폭발로로 인근 초등학생 76명이 사망하는 등 1000여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이 있었다. 당시 남한을 포함한 국제사회가 구호 지원을 보냈으나 북한은 오히려 이 사건을 남한 정보기관이 연루된 간첩사건으로 둔갑시켰다.

2004년 4월22일 평안북도 룡천군에서 60톤급 비료 운송 철도차량이 폭발해 사망 170여명, 부상 1000여명을 기록한 룡천폭발사건은 질안비료를 실은 열차의 지붕에 끊어진 고압선이 닿아 불꽃이 일면서 시작됐다.

사건 직후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도 24일 보도를 통해 “평안북 룡천역에서 질안비료를 적재한 화차들과 유조차들을 갈이(낡은 부분을 떼어내고 새 것으로 바꾸는 일)하던 중 부주의로 인해 전기선에 접촉해 폭발사고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북한이 대형 참사와 관련해 사고 발생 이틀 만에 신속히 외부에 공개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그만큼 상황이 심각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당시 사고 현장을 목격한 중국 소식통들 사이에서 “주변 일대가 불바다로 변했고, 사고가 난 기차역을 중심으로 반경 500m 이내 건물이 완파됐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역을 중심으로 반경 500m 안에는 역사와 학교 외에 4~5층 규모의 아파트가 다수 있었고, 사고 당시 룡천역에만 직원과 승객 등을 포함해 500여명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면서 한때 수천명 사망설도 유포됐다.

특히 사망자 가운데 인근 초등학생이 다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국제사회에서 폭발 현장 복구와 희생자를 돕기 위한 구호 지원의 물결이 일었다.

우리나라도 대통령 권한대행이던 고건 국무총리 주재로 ‘룡천재해대책 관계장관회의’와 ‘룡천재해대책 실무기획단’이 열리고 의료진 파견과 피해 복구, 이재민돕기사업 등이 범정부 차원에서 추진됐다.

이번에 룡천폭발사건에 대해 ‘데일리안’에 상세한 정보를 제공한 대북소식통은 “전기기관차의 고압선이 원인 모르게 끊어져 열차 지붕에 닿으면서 불꽃방전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마침 오전 수업을 마치고 점심을 먹기 위해 집으로 가던 룡천소학교 초등학생들이 호기심으로 주변에 몰려들면서 어린이들이 대거 사망했다”고 말했다.

실제 사건 피해 정도에 대해서도 “폭발이 일어나면서 열차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거의 사망했고, 바로 옆에 있던 유리를 실은 열차까지 같이 폭발하면서 수많은 유리조각들이 파편이 되어 날아다니는 바람에 희생이 컸다”고 전했다.

지난 4월 22일 오후 북한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남쪽으로 15Km 가량 떨어진 룡천군 룡천역에서 대규모 폭발사고가 발생, 3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진은 가스폭발 18시간이 지난 후의 인공위성이 촬영한 용천역 부근의 화염 모습이라고 밝힌 BBC방송 인터넷 홈페이지 사진.ⓒ연합뉴스

“폭발로 현장에 직경 약 15m, 깊이 10m 정도의 큰 웅덩이가 생겨났고, 철길은 뭉텅이로 끊어져 날라갔으며, 룡천군 읍 소재지의 모든 공공건물들과 주택들이 무너지거나 벽에 금이 갔다”고 설명했다. 당시 각국 언론이 보도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국제사회의 지원이 잇따르면서 북한 당국도 서둘러 현장 복구에 우선 착수했다. “당국이 주도해 현장 복구를 위한 돌격대를 전국 단위로 만들고, 중국과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지원해준 자재로 신축 공사도 진행했다”고 한다.

북한은 룡천폭발사건에 대해 대외적으로는 “우연히 발생한 사건”으로 공표했다. 하지만 북한 당국은 내부적으로 김정일 암살기도라는 미명 하에 보위부를 내세워 4년동안이나 이 사건을 수사했던 사실이 이번에 대북소식통을 통해 처음 확인됐다.

북한 내부에서 룡천폭발사건은 단순한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정일 암살기도’라는 음모론이 대두되더니, 북한 전역에서 핸드폰 금지령을 불러왔다. 이후 한국 정보기관이 조작한 간첩사건으로 둔갑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간첩사건 혐의를 받은 간부들이 총살로 처형당한 뒤 룡천폭발사건은 북한 간부들 사이에서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정의로운 사건으로 미화됐으며, 그 진위 여부는 아직 확인이 안 된 셈이다.

앞서 일부 외신이 “북한 간부들은 룡천폭발사건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암살 기도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는 보도를 한 적은 있다. 이런 의혹이 나온 데에는 공교롭게도 룡천폭발사건이 발생하기 9시간 전 때마침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탄 특별열차가 인근 역을 통과한 사실이 배경이 됐다.

북한 당국이 룡천폭발사건을 김정일 암살기도 사건으로 둔갑시키면서 사용한 첫 번째 의심되는 정황은 “폭발사고를 일으킨 질안비료를 실은 열차와 유리를 실은 열차 두 대가 이틀 전부터 신의주역에 방치됐었다”이다.

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탄 열차가 낮 12시에 신의주역을 통과할 때 신의주역에서 폭발하게 돼 있었지만 사전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이동 경로를 전달받은 역장이 새벽 1시경 역에 나와 순찰을 돌던 중 질안비료와 유리를 실은 열차들을 발견하고 이 열차들을 룡천역 화물차 대피선으로 이동시켜서 모면했다”고 선전했다.

그 다음 이야기는 “이 룡천역장의 조치와 함께 김정일이 탄 열차는 한시간 앞당겨져서 오전 11시에 신의주역을 통과했고, 룡천역 대신 천마산 방향으로 들어갔다. 이후 룡천역에서 폭발이 일어났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위기를 방지한 룡천역장은 영웅 칭호를 받았다”는 것이다.

소식통은 “이런 사건 경위를 조사해낸 보위부는 김정일의 이동경로가 중국에서 핸드폰을 이용해 알려졌다고 보고했으며, 이에 김정일이 화가 나서 북한 내에서 모든 핸드폰을 회수하고 핸드폰 사용을 전면 금지시켰다”고 전했다.

“북한에서 2003년부터 사용이 허가된 핸드폰이 이 사건으로 전면 금지됐으며, 이후 핸드폰이 재도입될 때에는 처음처럼 핸드폰에 중국산 카드를 넣으면 중국과 통화가 가능했던 기능이 폐지되고, 북한산 카드만 사용할 수 있도록 개조됐다”고 소식통은 덧붙였다.

북한 보위부에 의해 진행된 룡천폭발사건의 수사는 사건 발생 4년만인 2008년 철도성 8·9호 담당 부상이었던 서남식이 6.25전쟁 당시 남한에서 파견된 간첩이었다는 혐의를 받으면서 종결됐다고 한다.

소식통은 “서남식 외에도 그의 돈에 매수되어 간첩이 된 혐의를 받은 철도성 간부 8명과 문화상이자 북한서 드라마로까지 제작된 ‘첫 기슭에서’의 작가인 김진성이 체포된 뒤 총살당했고, 그 내용은 김정일에게 보고된 뒤 중앙기관 통보강연회에서 간부들에게 통보됐다”고 말했다.

이렇게 북한에서 어린 초등학생을 포함해 평범한 주민들이 대량으로 희생된 룡천폭발사건은 결국 남한 정보기관이 조작한 간첩사건으로 기록됐다. 하지만 북한 간부들 사이에서는 이 사건이 독재정권에 항거하기 위한 김정일의 암살기도 사건으로 회자됐다고 하니 1인지배체제에 대한 신뢰도는 일찌감치 추락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소정 기자 (bright@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0
0
김소정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댓글 0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