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카카오톡
블로그
페이스북
X
주소복사

'답답'한 신중함이 뚝심으로 완성된 '직진 정복'


입력 2014.05.27 09:39 수정 2014.05.27 18:06        백지현 기자

<측근들에 듣는다 우리 후보는요③-유정복 새누리당 인천시장 후보>

'박근혜의 남자' 된 이유는 과묵하고 한결같은 모습 때문

유정복 후보의 신중함은 정평이 나 있다. 대충이라는 게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주변에서는 그 지독한 신중함에 답답함을 느낄 때가 한두번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철저한 신중함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유정복을 쓰러지지 않게 만든 요인이 됐다.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처음에는 속에서 천불이 났다.”

유정복 새누리당 인천시장 후보와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온 정치권의 한 인사에게 유 후보의 평을 부탁했더니, 손바닥으로 가슴부터 ‘탁탁’치며 이같이 말했다. 유 후보의 신중하고 과묵한 성격을 두고서다.

신중함이 흠이 될 일은 아니지만, ‘두드린 돌다리’도 또 한 번 두드리고 건너는 성격은 업무 스타일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나 때로는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일을 처리하는데 확신이 서기 전까지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처음에는 정말이지 속에서 천불이 났다”고 고백했다.

신중함을 넘어서 완벽함을 추구하는 그는 ‘대충’이란 게 없다. 단적인 예로 “정확한 수치가 생각나지 않으면 ‘대략 얼마다’라고 말할 법도 한데, 다시 확인한 뒤 마지막 단위까지 말하더라.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런 꼼꼼함에 일을 그르치는 법이 없다”고 했다.

공직 사회에서 그와 손발을 맞춰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유정복에게 일을 맡기면 실수란 없다’고 입을 모은다. 신중한 성격 탓에 그는 어떤 결단을 내리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리는 편이다. 그러나 일단 결단을 내린 것에 대해서는 불같은 추진력을 보인다. 안전행정부 장관 당시 ‘직진’이라는 별명을 얻은 데서도 그의 추진력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다.

그는 탄핵정국의 17대 총선 당시를 20년 정치생활 중 가장 어려웠던 때라고 고백했을 정도였지만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역풍으로 당시 한나라당은 50석도 건지기 힘들 것이라는 게 정치권 안팎의 지배적인 평이었다.

당시 여론조사 결과, 유 후보는 상대후보의 지지율에 반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열세에 몰렸다. 그러나 ‘성실함’을 바탕으로 한결같은 모습을 보이면서 유권자들의 마음을 샀다. 결국 그는 경기·인천 지역에서 초선의원으로서 한선교 의원과 단 둘이서 당선돼 당시 박근혜 대표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됐다.

유정복, ‘박근혜의 남자’가 된 계기는...

“처음에는 유 후보가 ‘박 대통령의 신뢰를 얻은 이유가 뭘까’는 의문을 가지고 지켜보게 됐다. 정치인으로서는 답답하리만큼 과묵하고, 소위 시쳇말로 ‘정치적’이지 않아서 저런 사람이 어떻게 정치를 할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하게 본연의 역할을 다하는 게 정답인 것 같더라.”

유정복 후보는 자타가 공인하는 '박근혜의 남자'이지만 단 한 번도 그런 평가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적이 없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유정복’하면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인물이 있다. 바로 박근혜 대통령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복심’, ‘박근혜 대통령의 남자’, ‘친박(親朴)실세 중 실세’ 등등. 그의 이름에 뒤따르는 수식어에는 ‘박근혜 대통령’을 빼놓을 수 없다.

2005년 한나라당 당시 박근혜 대표의 비서실장을 지낸 후로 지금까지 줄곧 박 대통령의 곁에서 보필해왔다. 친박 실세라는 타이틀은 박심(朴心·박근혜 대통령의 의중)논란으로 이어져 공세의 여지를 남기기도 했지만, 그는 애써 부인하지 않는다.

‘실세 중의 실세’라고 거론되면서도 그는 한 번도 정치적으로 이를 이용해 본적이 없다는 게 측근들의 설명이다. 주변과 언론에서 친박으로 공격해도 본인이 맡은 바 역할에 충실한 한결같음이 박 대통령의 신뢰를 얻은 것이라는 평가다.

유 후보는 1957년 인천에서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인천의 송림동 달동네와 간석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유 후보는 저서 ‘녹색연필’을 통해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머님은 삯바느질도 하고 두부와 묵을 만들어 팔면서 우리 7남매를 키우셨다”고 회고했다.

넉넉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란 유 후보는 자연히 공직에 대한 꿈을 품었다. 선인중학교을 거쳐 지역 명문인 제물포고를 나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입학했다. 대학을 입학할 당시의 꿈은 ‘외교관’이었다. 재학당시 경험삼아 본 행정고시에 합격하면서 엘리트 공무원의 길을 걷게 됐다.

그는 강원도청과 내무부를 거쳐 1993년도에 경기도 기획담당관으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인 행정경험을 쌓았다. ‘행정의 달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그의 이력 앞에는 ‘최연소’ 타이틀이 유독 많이 눈의 띈다.

1994년에는 제33대 김포군수로 최연소 기초자치단체장 기록을 세웠고, 1995년부터 제5대 인천서구청장을 지냈다. 또 1·2대 김포시장을 연이어 지내면서 전국 최연소 구청장·시장으로 기록됐다.

백지현 기자 (bevanila@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0
0
백지현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댓글 0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