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맞벌이 아빠의 유치원 추첨 '고행기'
9명 뽑는데 수백 명씩 몰려…신규 입학수요 450명에 전체 수용인원 150명
12월 1일 오후 4시. 출입처 특성상 하루 쉬겠다고 하긴 눈치 보이는 연말이지만 휴가신청서를 제출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선배보다 후배 눈치가 더 보이지만, 후배보다 더 무서운 존재는 ‘딸내미’다. 내일은 그 무서운 딸내미의 유치원 입학 추첨일이다.
12월 1일 오후 7시. 술자리에 함께한 몇몇 후배들에게 그들이 굳이 궁금해 하지도 않는 해명을 늘어놓는다. “니들도 자식 생겨봐라. 나 편하자고 쉬는 게 아니다.”
12월 2일 오전 12시. 집에 도착해 아빠 기다리며 징징거리다 잠든 딸내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아빠가 능력이 안 되는 관계로 엄마가 생업 전선에 내몰려 만 14개월부터 어린이집에서 ‘사회생활’을 하게 된 딸내미가 안쓰럽다. 몇 달 뒤면 우리 딸내미는 더 큰 세상인 ‘유치원’에서 새로운 사회생활을 해야 한다. 그곳에서의 연착륙 여부는 생전 도박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아빠의 도박(?) 실력에 달렸다.
12월 2일 오후 4시.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찾아 유치원으로 향한다. 내년부터 다니게 될 유치원 알아보러 간다고 간단히 경위를 설명하자 아이가 투덜거린다. “유치원 싫어, 안 놀고 공부만 하잖아.” 세상에 나온 지 40개월 만에 벌써 인생의 고달픔을 예견하다니 내 딸이지만 대단하다.
경기도 광명시 하안동에서 우리 아이가 가까운 유치원에 다니게 될 확률은 약 3대 1. 이 지역 6개 유치원에서 내년 우리나이로 5세가 되는(현재 만 3세) 아이를 10여명에서 30여명씩 총 150명가량 모집하는데, 유치원별로 5세반 지원자가 많게는 450여명에서 적게는 300여명이 몰렸다. 대부분 중복 지원(한곳 지원해서 당첨된다는 보장이 없으니)인 점을 감안하면 450여명이 150개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게 되는 셈이다.
여기에 형제가 이미 해당 유치원을 다니는 경우 동생이 우선순위가 되기 때문에 전체 정원에서 이 인원을 제외하면 경쟁률은 4대 1 이상으로 올라간다.
이 숫자를 되새기며 아빠는 광명시장, 혹은 경기도지사, 혹은 경기교육청장의 멱살을 잡고 싶은 욕구에 휩싸인다(알고 보니 유치원 수용인원과 관련해 멱살을 잡아야 할 사람은 교육청장이었다).
12월 2일 오후 4시 30분. 광명시 하안동 A 유치원에 도착했다. 추첨 장소에는 어림잡아 500명은 돼 보이는 인파가 몰려 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여성이었다. 개중에는 휴가를 내고 온 직장여성도 있겠지만 더 많은 숫자는 전업주부다.
참 우스운 일이다.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는 게 가장 절실한 건 맞벌이 부부지만, 정작 유치원 입학 추첨에 참여하는 건 전업주부가 있는 가정보다 더 힘들다.
전업주부는 아이가 어린이집 시절부터 나름대로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사전 정보도 입수하기 쉽고, 원서 접수와 추첨에 참여하는데도 어려움이 없지만, 맞벌이 부부들은 그 과정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
추첨에서 떨어질 경우 전업주부는 집에서 아이를 돌보며 대기순번을 기다릴 여유가 있지만, 맞벌이 부부는 당장 대안을 찾아야 한다. 극단적으로는 둘 중 하나가 직장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이래놓고 출산율과 여성 취업률 운운하는 정치인과 공무원들도 직장을 포기하게 만들 방법이 없을까 잠시 고민해본다.
12월 2일 오후 5시. 이곳에 모인 부모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절대갑(甲)’인 유치원 원장은 간단히 절차를 설명하고 추첨에 돌입한다.
이른바 ‘형제특례입학’ 정원을 제외한 신규 모집 인원은 5세반의 경우 남아가 15명, 여아가 9명이란다. 이곳에 모인 이들 중 내 것과 같은 분홍색 쪽지(여아지원서)를 들고 있는 사람만 어림잡아 200명은 넘을 것 같은데, 그야 말로 바늘구멍 통과하기다.
추첨은 7세반부터 시작한다. 이미 다른 유치원에 다니고 있는 아이를 이곳으로 옮기려고 하는 일종의 ‘편입’ 수요인데, 이건 경쟁률이 그다지 높지 않은 듯하다.
다만, 5세반 부모들도 7세반과 6세반 추첨에 촉각을 기울여야 한다.
“OOO번 아무개 어린이 당첨되셨습니다. 아, 이 아이는 동생이 있네요.”
원장의 멘트에 5세반 부모들 사이에서 탄식이 터져 나온다. 기존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의 형제 외에도 이번에 새로 7세반이나 6세반에 당첨된 아이가 5살짜리 동생이 있을 경우 동생까지 자동 당첨된다. 5세반의 정원이 그만큼 줄어드는 셈이다.
7세반과 6세반 추첨을 거치며 발생한 ‘추가 형제특례입학’으로 가뜩이나 경쟁이 치열한 5세반 정원이 무려 4개나 날아갔다. 그 와중에도 딸을 둔 부모들은 줄어든 정원이 모두 남자반이라며 기뻐한다.
추첨을 마친 연령대의 부모들은 등록증을 받아 자리를 떴지만, 추점 장소에는 여전히 400여명의 부모들이 남아있었다. 이들이 모두 우리 아이의 경쟁자다.
12월 2일 오후 5시 20분. 아이 엄마에게 ‘OOO유치원 도착’이라는 문자가 온다. 인근의 또 다른 유치원에서 5시 30분에 입학 추첨을 진행하는 관계로 아이 엄마는 직장에서 조퇴하고 그곳으로 달려가야 했다.
추첨에 한 시간 넘게 소요되는데 같은 지역의 두 유치원이 30분 간격으로 추첨을 진행하다니 맞벌이 부부에겐 여러 모로 잔인한 시스템이다.
전날엔 유치원 세 곳에서 한 시간 간격으로 추첨을 진행해 아이 엄마와 장인, 장모까지 동원돼 세 탕을 뛰어야 했다.
12월 2일 오후 5시 30분. 드디어 ‘메인 이벤트’인 5세반 추첨이 시작됐다. 첫 당첨자가 등장하자 다른 부모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며 축하해줬다. 하지만 당첨자가 하나 둘 늘어날수록 ‘본색’이 드러났다. 박수 소리는 점차 잦아들고 탄식이 더 크게 터져 나온다. 당첨자들이 내 아이가 들어갈 자리를 하나씩 가져가는 셈이니 마냥 축하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간혹 호명된 당첨자가 자리에 없는 상황도 발생한다. 이 때는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추첨 장소에 안 오면 기회는 다른 이들에게 넘어가기 때문이다.
결국 마지막 9번까지 우리 아이의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는 딸내미는 빨리 키즈카페 가자고 졸라대기만 한다. “지금 키즈카페가 문제가 아냐”라고 한마디 하려다 입을 닫는다. 딱히 아빠의 잘잘못을 따지긴 애매한 상황이지만, 왠지 미안하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대기자 추첨이 남아있다. 대학으로 치면 예비합격자 개념이다. 다른 부모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여러 유치원에 중복 지원을 하는 만큼 복수의 유치원에 당첨되면 입학 포기자가 나올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10명을 뽑는 대기자 추첨에서도 우리 아이의 이름은 끝내 들려오지 않았다.
12월 2일 오후 6시 10분. 대기자 추첨까지 모두 끝났지만, 여전히 많은 부모들이 자리를 뜨지 않고 있었다. 뭔가 있으니 그럴 것이다. 잠시 기다려 보기로 했다.
몇몇 아이엄마들이 앞자리 원장에게 다가가 무엇인가를 요구한다. 잠시 후 원장이 대기자를 추가로 뽑겠다고 발표한다. 이미 절반 정도는 자리를 떴으니 확률은 좀 더 높아질 터. 역시 엄마들은 똑똑하다.
하지만 앞에서는 계속해서 다른 아이의 이름만 불린다. 엄마들의 거듭된 요구에 따라 대기자 추가 추첨이 수차례 계속 되며 10명씩 무려 4차까지 이어진다.
드디어 우리 아이의 이름이 불렸다. 원장이 지원서에 ‘대기번호 39번’이라고 적어준다. 이걸 기뻐해야 하나. 정원이 9명인데 대기번호 39번이라니. 정원 전체가 다섯 번은 통째로 빠져나가야 우리 아이에게 기회가 온다.
이런 식으로 지난 이틀간 우리 가족이 추첨에 참여한 어린이집은 총 다섯 곳. 그나마 다행이도 한 곳이 당첨됐다.
그곳이 마음에 들건 그렇지 않건 선택권이 없다. 현실이 이럴 줄 몰랐을 때는 부부가 마주 앉아 어느 유치원이 교육 환경이 좋고 평판이 좋은지를 놓고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멍청한 짓이었다. 원장의 성격이 어떻건, 추가 비용을 많이 받기로 악명이 높건, 아래층 애견센터에서 개 냄새가 진동을 하건 우리에겐 애초에 선택의 자격이 없었다. 어느 유치원이건 들어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게 대한민국 경기도 광명시에서 아이를 가진 부부의 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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