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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다난(多死多難)의 2014! 부끄러운 대한민국


입력 2014.12.31 08:08 수정 2014.12.31 21:09        데스크 (desk@dailian.co.kr)

<송년칼럼>세월호에 종북콘서트에 땅콩회항까지

상식이 죽고 품위가 죽고 책임이 죽고 또 죽고

세월호 침몰참사 243일째인 14일 저녁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팽목항 방파제의 등대 위로 검은 밤하늘에 떠있는 별들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다. 2014년 4월 16일 전남 진도군 조도면 관매도 인근 해상에서 승객 476명을 태운 인천발 제주행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했다. 전체 탑승인원 476명 중 295명이 사망하고 9명이 실종된 참사로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난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 261명, 일반인 희생자 43명이 희생됐다. (ISO감도 640, 셔터스피드 30초, 조리개 F=11, 145장 합성)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2014년을 정리하는 사자성어는? 나 같은 사람에게까지 그런 걸 물어줄 리 만무하니 자문하여 자답한다면 다사다난이다. 다사다난(多事多難)이 아니라 다사다난(多死多難). 정말이지 참 많이도 죽었다. 물에서 죽고 군대에서 죽고 걸 그룹 구경하다가 도심에서 죽고 살기 힘들다고 세 모녀가 스스로 죽고 사이코패스에게 걸려 절단 나 죽고. 뭐 사람만 죽은 게 아니다. 통진당 위헌 판결로 민주주의가 죽었으며 이것도 국가인가 힐난 끝에 나라도 죽었다. 물론 통진당 관련으로 죽은 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인민민주주의다. 15년 간 꼼수로 포장하며 버텨 온 인민민주주의가 내란 선동 등 틈틈이 본색을 드러낸 끝에 죽었다.

국가를 죽인 것은 사고를 사건으로 몰고 가려는 인물들이었다. 배가 가라앉은 것은 ‘사고’였지만 구조하지 못했거나 혹은 안 했기 때문에 ‘사건’이라는 논리였다. 개인은 무책임하고 국가는 단지 무능했을 뿐이다. 그게 우리의 자화상이었을 뿐인데 그들은 국가를 죽였다. 미안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이 세 마디로 이들은 2라운드 종이 울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라 안에서만 죽은 게 아니다. 뉴스를 듣는데 또 백인 경찰이 흑인 청년을 죽였다. 문득 이런 생각 든다. 왜 만날 백인 경찰은 흑인 청년만 쏘는 걸까. 가끔은 흑인 경찰이 백인 청년을 쏘기도 하고 아니면 백인이 백인을 쏘거나 흑인이 흑인을 쏘면 안 되는 걸까.

품위가 죽고 상식이 죽고 책임이 죽었다. 땅콩 하나 때문에 뜨려던 비행기가 뒷걸음질 쳤다. 돌리라 명령한 사람은 품위가 없었고 돌리란다고 정말 돌린 사람은 상식이 없었다. 기장은 비행기의 최종 책임자이기 때문에 “회사의 임원이기는 하지만 당장은 승객이기 때문에 당신이 내리세요” 했어야 맞다. 돌리라고 말한 사람에게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철부지 아줌마가 술김에 한 짓에 대해서까지 언급하는 것은 시간낭비다. 황선-신은미 애북(愛北) 2인조는 사실과 동떨어진 발언을 토크 콘서트 형식으로 진행하여 우리 사회의 상식을 죽였다(종북이라고 하면 걸린다하여 숙려 끝에 찾아 낸 단어가 애북이다).

세월호 침몰참사 259일째인 30일 저녁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팽목항 방파제 너머로 잊을수 없는 2014년의 해가 저물고 있다. 2014년 4월 16일 전남 진도군 조도면 관매도 인근 해상에서 승객 476명을 태운 인천발 제주행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했다. 전체 탑승인원 476명 중 295명이 사망하고 9명이 실종된 참사로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난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 261명, 일반인 희생자 43명이 희생됐다. (ISO감도 640, 셔터스피드 1/250, 조리개 F=11, 104장 합성)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한 체제가 보여주고 싶은 것만을 보고 온 사람들이 그 체제에서 살다 살다 힘들어 도망친 사람들을 죄다 머저리, 등신으로 만들었다. 탈북을 하는 걸 보면 거주 이전의 자유도 어느 정도는 있는 것 같다는 발언은 애북적인 상상력이 보통의 상식을 목 졸라 죽인 대표적인 케이스다. 두 사람을 보며 사람들이 말했다. 거참, 멀쩡하게 생겨가지고는. 아니다. 멀쩡하게 생기지 않았다. 얼굴은 사람의 마음을 담는 그릇이다. 마흔이 넘으면 그렇게 된다.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들의 얼굴은 어두웠다. 침침하고 불결했다. 적대심과 증오가 그 안에 있었다. 나라와 역사에 대한 불만이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세월을 오래 보내다보니 그렇게 변한 것이다. 자기가 살고 있는 땅을 그렇게 못마땅해 하면서도 정작 그 땅에서 잘만 사는, 수시로 유체이탈을 보여주는 초능력이 부럽기까지 하다.

이른바 사회지도층 인사들(사실 이 표현은 좀 짜증난다. 대체 누가 누가를 지도한다는 말인지)의 윤리 파산도 2014년의 주목할 만한 성과(?) 중 하나다. 전 국회의장은 골프장 캐디를, 사단장은 여군 병사를, 교수는 학생을 성추행했다. 딸 같아서 툭 건드린 거란다. 귀여워서 만진 거란다. 그런 식이라면 누구나 귀엽다는 이유로 길 가는 미모의 여성을 만지지 못할 까닭이 없다. 승승장구한 인생들이 그렇단다. 거칠 것 없고 제지 받아 보지 않아서 그런 거란다. 그건 그쪽 사정이고 같은 세상을 다른 도덕 기준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을 관대하게 대해 줄 필요는 없다.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제재를 해줘야 한다. 물론 그런다고 진심으로 반성하거나 정신 차린다는 의미는 아니다. 제주 지검장의 음란 행위도 돋보였다. 검찰은 ‘성(性) 선호성 장애’ 때문에 일어난 병적 행동으로 보고 치료를 전제로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성선호성 장애만 있으면 다 용서되는 거다. 장애만 입증하면 끝나는 거다. 정말이지 높은 분들에게는 참 좋은 세상이다.

언론도 죽었다. 세월호 때는 죽음을 생중계하며 전 국민을 정서 고문했다. 보도 원칙상 써서는 안 되는 자극적인 표현을 숱하게 쏟아냈다. 9.11이고 후쿠시마 참사고 또 무슨 쓰나미고 간에 우리처럼 직설적인 보도를 펼치는 나라는 찾아보기 힘들다. 아비규환, 생지옥, 눈 뜨고 못 볼 참상 따위의 헤드라인을 거침없이 가져다 쓴다. 팽목항에서, 지면(紙面)을 가진 기자들은 ‘사실’을 쓰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느낀 자신의 ‘심정’을 썼다. 그러나 슬픔을 가지고 글 솜씨를 뽐 내서는 안 된다. 그런 건 개인 방송이나 SNS에서나 하는 짓이다. 보도에는 정제와 절제가 필요하다. 방송을 공기(公器)라고 부르는 이유다. 에어포켓이니 다이빙 벨이니 검증도 되지 않은 것들을 사실 확인 없이 내 보냈다. 과학이 빠지면 보도가 아니다.

‘카더라’로 진행하는 방송을 국민들은 ‘그런가?’ 하며 보고 있어야 했다. 청와대 마당쇠들이 누가 더 권력에 가까이 있는지를 놓고 이전투구를 벌였다. 언론은 이를 증폭해서 아예 드라마로 재구성했다. 아무 것도 없었다.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이면 그래도 나았다. 쥐새끼조차 없었다. 가뜩이나 정치에 환장한 한국 남자들의 술자리 안주만 풍족해졌을 뿐이다. 중요한 건 이거다. 그렇게 난리를 쳐 놓고도 마무리는 항상 ‘아니면 말고’ 식이다. 그리고 또 다른 사건으로 우르르 달려간다. 언론에게는 참으로 다행히도 한국 사회는 매일매일이 격동의 세월이다. 사건, 사고는 줄지어 터지고 언론은 마르지 않는 샘을 가진 소재를 ‘드라마 작가’나 다름없다. 그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는 매일 골탕을 먹는다.

언론은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들은 주목하지 않았다. 최근에는 한수원 사태가 그렇다. 해킹이라는 표현을 쓰면 안 된다. 정확히 말해 크래킹이고 내전(內戰)에 준하는 상황이다. 사이버 전쟁에 대해 우리는 너무 관대하거나 지나치게 무지하다. 수원 팔달산 ‘토막 시신’ 사건은 살인과 장기 이식 그리고 인신매매라는 전혀 다른 이야기 셋을 뭉뚱그려 보도했다. 우리나라는 장기 이식 신청을 하면 부지하세월로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중국은 환자가 날짜를 정하면 그 날짜에 맞춰 수술해준다. 웃을 일이 아니다. 현재 장기 적출 대상자는 주로 파룬궁 관련자들이라고 한다. 이들은 수감되면 신체검사부터 받는다. 주기적으로 신체 상태에 대한 팔로 업도 이루어진다. 어떤 게 쓸 만하고 어떤 게 신통찮은지 점검하는 것이다. 끔찍하다.

아태지역 담당 국무장관을 지낸 캐나다의 데이비드 킬고어 박사는 한국 정부가 중국 공산당의 불법 장기매매 실태를 묵인하고 있다는 주장을 폈다. 한국 사회에서 중국 정부의 영향력이 그만큼 거대하다는 반증이라며 정치권과 정부, 언론의 중국의 반인류 범죄 침묵을 비판했다. 장기 적출 공장, 시체 공장, 인육 매매 등 듣기만 소름이 돋는 무서운 단어들 앞에서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노무현 정권 당시 인권을 앞세워 외국인 지문날인을 폐지했다. 인권을 사회안전망 위에 놓았다. 외국인의 인권만 중요하고 자국민의 안녕은 아무렇게나 돼도 상관없다는 말인가. 2008년 이후 외국인 지문 날인은 다시 시행됐다. 그러나 2003년부터 2008년 사이 입국한 불법체류자들의 신원정보는 확인 불가다. 추산하기로 대략 52만 명으로 국내 거주 외국인 98만 명의 절반이 넘는다. 답답하고 불안하다. 결국 각자도생(各自圖生)하라는 얘기다. 사고는 어디서 터질지 모르니 알아서 조심조심 다니고 신체에 대한 안심도 각자 챙기라는 말씀이다. 이런 나라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내년에는 나아질까. 그럴 리가 없다. 나빴던 것이 어떤 계기도 없이 갑자기 좋아지는 일 같은 건 없다. 한 해를 보내고 또 새로운 한 해를 맞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러나 한 해를 겨우 목숨 부지하고 보내고 또 어떤 일이 터질지 알 수 없는 새해를 맞는 것은 하나도 즐겁지 않다. 마무리를 대체로 긍정적으로 하는 것은 이런 류 칼럼들의 오래 된 관행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지도 못하면서 근거 없이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짓이 없다. 새해에도 눈치껏 조심조심 살아서 2016년에 살아서 또 만납시다, 정도가 양심 있는 발언일 것이다. 소원 성취가 아니라 그저 무탈한 한 해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글/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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