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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과 무학대사를 싸우게 만든 전설의 바위는...


입력 2015.02.21 10:19 수정 2015.02.21 10:24        최진연 문화유적전문기자

<최진연의 우리 터 우리 혼 - 남근석 기행>장안의 명소 인왕산 ‘선바위’

인왕산 선바위는 옛 부터 자식을 바라는 기도처로 장안 사람들에게 명소로 소문난 곳이다. 거무스름한 빛깔의 해괴한 형태의 크고 작은 구멍들이 수 없이 금형 틀처럼 바위 속 깊이 새겨져 있는 이 선바위는 높이 6.7m, 넓이 7m의 높이로 국사당 위쪽에 있다.

북한산 일대는 해골모양의 바위들이 많이 분포돼 있는데, 이는 중생대 말 지층에 파고든 화강암이 땅 아래서 위로 솟아 침식작용으로 표면에 드러났다가 다시 풍화작용으로 형성된 바위다. 이처럼 해괴망측한 바위들은 1억년이 넘을 만큼 아득한 세월의 더께를 간직하고 있다.

장안의 명소 인왕산 선바위ⓒ최진연 기자

옛 사람들은 소름끼치도록 섬뜩한 거석문화에 삶을 의지해 왔다. 괴이한 바위에 빌면 소원성취 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일찍부터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런 바위는 전국적으로 볼 수 있는 암석숭배의 일종이지만 이것이 전설화되고 무속신앙과 밀착되면서 치성장소가 됐다.

인왕산 선바위도 정성을 다하면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뤄진다는 전설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특히 작은 돌을 바위에 붙이면 효험이 더욱 크다 해 선바위에는 돌을 문질러서 붙인 자국이 지금도 많이 남아있다.

인왕산 선바위에는 조선 태조의 한양천도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흥미진진한 일화가 있다.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관세음보살과 닮은 선바위 모습에 감탄하며 무학대사에게 천일기도를 올리게 했다. 그 후 임금이 된 태조는 도성을 축성하게 된다(1395년). 그런데 이 바위를 성안 쪽에 넣고 쌓아야 한다는 무학대사와 이를 반대하는 개국공신 정도전 사이에 논란이 벌어졌다.

장삼을 입은 스님의 뒷모습을 연상케하는 선바위ⓒ최진연 기자

대사는 선바위를 도성 안에 두면 1천년 동안 도읍지로서 영화를 누릴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5백년 밖에 가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도전은 선바위가 도성 안에 있으면 불교가 다시 살아나 불교로 인해 고려처럼 망할 것이며, 선바위를 성 밖에 두면 유교가 발전해 나라에 평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자 태조는 정도전의 의견을 따랐다. 두 사람의 논란이 계속 될 때 이상하게도 성을 쌓은 자리에만 눈이 내려 그 자리대로 성을 쌓고 보니 선바위가 밀려났다는 전설도 있다.

국사당은 원래 남산 꼭대기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남산기슭에 있던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이보다 더 높은 곳에 국사당이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제가 강제로 인왕산으로 이전시켰다. 국사당의 이름은 ‘임금의 스승(國師)’ 대접을 받은 무학대사를 신주로 모신데서 유래됐다. 지금의 자리로 옮긴 이유도 선바위가 무학대사의 기도장소였기 때문이다.

남산에서 옮겨 온 국사당ⓒ최진연 기자

태조 때 조선왕조실록에는 남산을 목멱대왕으로 부르고, 호국의 신으로 삼아 개인적인 제사는 금하고 국가의 공식행사로만 기우제와 기청제를 지냈다고 한다.

1970년 대 후반 새마을정화사업 이전 선바위 주변은 수많은 암자와 점집, 굿집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취를 감추고 국사당 하나만 남았다. 민속자료로 지정된 국사당에는 태조 이성계와 호신신장(護身神將)을 모시고 무당들이 굿을 하고 있다.

선바위는 우뚝 서 있는 바위라 해 ‘선바위', 또한 모양이 마치 승려가 장삼을 입고 참선하는 형태 같다해 ‘선바위(禪巖)’라고도 불렸는데, 뒤에서 보면 장삼을 입은 승려둘이 나란히 앉아 남산과 서울 시내를 지긋이 내려다보는 듯하다.

인왕산 선바위 가는 길은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에서 내려 세란병원 뒤쪽 현저동 골목길을 따라가면 나타난다.〔〕

최진연 기자 (cnnpho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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