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금융'은 못 끝낸다고 전해라
정책 도입 15개월만에 공급총액 58조4000억원
은행도 '가야할 길' 공감대 형성…'자율화' 관건
“기술금융의 방향은 맞죠. 정착을 위해선 은행 스스로 기술력을 평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은행이 중소기업의 기술력을 평가해 대출해 주는 ‘기술금융’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급하게 밀어붙인 정책의 부작용과 수동적인 금융사의 분위기가 사그라지면서 실효성에 대한 의문도 함께 가라앉았다.
금융위원회와 전국은행연합회가 지난해 7월부터 올 10월까지 은행권의 기술금융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창업-중소기업에 대한 은행권의 기술신용대출 잔액은 총 58조4000억원이었다. 이 가운데 기존 대출의 금리를 변경하거나 기간을 연장한 금액을 제외한 신규 대출 기술신용대출 평가액은 30조9000억원이다.
기술금융 대출을 받은 기업이 부담한 평균 금리는 올해 3분기 3.99%였다. 이는 정책 도입 전 1년간(2013년 7월∼2014년 6월)의 5.07%에 비해 1.08%포인트 낮은 수치다. 기술신용대출 가운데 무담보·무보증의 순수 신용대출 비중은 24.9%였다. 전체 기술금융의 4건 중 1건 꼴이다.
기술금융은 지난해 7월 정부가 창조경제 활성화를 위해 금융회사들에 기술력을 담보로 중소-벤처기업에 자금을 적극 지원하도록 권고하며 시작됐다. 정책 시행 초기만 해도 은행들이 기술력 있는 기업들에게 신규 대출을 늘리지 않고 기존 대출의 금리만 조정하는 형식적인 대출을 통해 ‘무늬만 기술금융’으로 포장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녹색금융과는 달라"…은행지점장 10명 중 8명 '정착 가능'
당시만 해도 금융권에선 “녹색금융 전철을 밟을 것”이라는 말이 많았다. 앞서 이명박 정부에서 녹색금융 출범 당시 42개의 녹색금융 상품이 쏟아져 나왔지만 정권이 바뀐 뒤 대부분의 은행이 ‘녹색’ 상품 판매를 중단하거나 통합해 흐지부지됐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 때의 IT벤처 육성책,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금융허브 정책 등 매 정권마다 내세운 금융정책 구호가 울렸다가 소멸하는 일이 반복됐다.
하지만 기술금융은 녹색금융과 성격이나 추진 배경 등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게 금융당국 관계자의 설명이다. 한 관계자는 “녹색금융은 특정 기업을 선별해 지원하는 정책이었지만 기술금융은 은행들의 여신 관행을 변화시키는 정책”이라며 “일회성 정책이 아닌 앞으로 금융이 가야할 방향이고, 계속 추진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시중은행에서도 기술금융에 대한 공감대는 형성됐다. 금융위가 지난 10월 30일부터 11월 20일까지 은행 지점장 3305명을 대상으로 기술금융에 대한 정책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82.9%가 ‘기술금융의 여신관행 정착 가능성’에 대해 긍정적이라고 답했다. 또 “5년 이내에 기술금융 정착이 가능하다”는 응답이 전체의 81.3%를 차지했다.
"가야할 방향" 공감대 있는데...'어떻게 자율적으로' 관건
은행들은 기술금융을 “힘겹지만 가야할 길”로 받아들이고 있다. 기술력평가 기준 마련 등의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갈 수밖에 없는 점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시중은행 한 지점장은 “은행 입장에서 그동안 신용평가와 부동산 담보에 의존했는데, 최근 부동산 시장도 불안정하고 신용도 높은 기업이 갑자기 파산하는 경우도 있다”며 “기술력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대출여부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은행 지점장은 “기술금융이 안정적으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기술력 평가 결과 신용리스크가 증가하지 않아야 하는데, 이를 확인하려면 3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고 밝혔다.
문제는 ‘어떻게 자율적으로 기술금융 기반을 마련해주느냐’다. 금융당국이 은행의 고삐를 당겨 시행하는 정책은 정권이 바뀌면 소멸되는 악순환의 또 다른 고리가 될 수밖에 없다. 정책에 대한 당위성이 충분한 만큼 은행 스스로 연착륙할 수 있도록 당국의 ‘방관자적 정책지원’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시중은행 한 관계자는 “정부의 정책이 시작되면, 그것이 은행에 도움이 되든 안되든 반짝 시늉만 하게 되는 관념이 있다”며 “금융회사들끼리 ‘이정도 선에서 적당히 하자’는 공감대가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기술금융의 성패가 정부가 아닌 은행의 의지에 달려있기 때문에 은행 자체 기술평가 능력개발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정책이 집중돼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이에 금융위는 기술정보데이터베이스(TDB) 기능 강화를 통해 기술신용평가기관(TCB)의 평가 효율화를 위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제공하고, 대출 정보 집적을 통해 TCB에 대한 평가 정확성을 점검하기로 했다. 또 지식재산권 투자펀드 투자 확대와 기술평가 기반 펀드를 350억원 이상 규모로 지속적으로 조성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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