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과 절교한 후배의 증언 "시민활동 거절 이유가..."
지인 A씨 "'석과불식' 붉은전사 길러내는 중요성 설명"
1960년대부터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와 '독서운동'을 벌이며 '서클'을 함께 지도했던 A 씨가 작고한 신 교수를 추앙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일침을 가했다. 그는 신 교수에 대해 "거짓 전향한 인사로 '붉은색 전사'들을 키워내 온 것에 자부심을 느껴왔다"고 평했다.
민주주의가 정착된 한국 사회를 부정하면서 이를 '후학 양성'이라는 방법으로 다시 장기적 안목에서의 '혁명'을 꿈꿨다는 것이다.
신 교수의 서울대 상대 7년 후배이자 젊은 날을 함께했던 A씨는 통혁당 사건 이후에도 신 교수와 친밀하게 교류하다가 2011년께 교류를 끊었다. 천안함 폭침사건을 계기로 북한에 대한 신 교수와 자신의 인식차이를 확연히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어느 순간 신 교수를 만나 얘기를 나누던 중 "이건 아닌데" 라는 이질감을 느꼈다.
A씨는 24일 '데일리안'과 전화인터뷰에서 "여러해 전까지 신 교수와 매우 가까이 지내면서 그를 무척 좋아하여 따랐는데 어느 날 만나서 얘기하다가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 이후부터 만남을 자제했다"면서 "난 60년대부터 지금까지 북한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인정해본 적이 없다. 군사정권에 대해 반대하고 민주화를 외쳤던 것인데, 신 교수를 비롯한 서클 활동을 함께한 지인들은 여전히 한국사회가 독재라는 주장을 했다"고 말했다.
A씨는 "특히 천안함 사건 직후 신 교수를 비롯한 나와 친했던 지인들의 생각을 들었는데 북한의 소행이라는 내 생각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서 "그때를 전후로 신 교수를 비롯한 친한 주변 지인들의 대북관이 드러났다. 그 이전까지는 '민주화'라는 말로 감춰 지낼 수 있었는데 천안함을 계기로 한국사회가 독재라는 등의 주장을 펼쳤다"고 주장했다.
이어 A씨는 "나와 과거 사상을 공유했던 사람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인민민주주의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라고 덧붙였다.
A씨는 성공회대에 들어간 신 교수에게 "성공회대 교수들을 멀리하라"고 조언을 하기도 했다. 성공회대 교수들의 북한을 바라보는 방향이 잘못됐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A씨는 이후 성공회대 교수들의 대북관이 신 교수의 영향으로 형성됐다는 사실을 인지한 후 충격에 빠졌다.
A씨는 "신 교수가 '석과불식'에 대해 언급을 많이 했는데 이 해설 내용을 봤을 때 소름이 끼쳤다"면서 "석과불식에 대한 신 교수의 해설은 자신이 전향서를 쓰고서 감형을 받고 살아남은 이유와 경위 그리고 그 정당성을 변명하는 것인데 이는 수많은 인고의 세월동안 많은 붉은 색의 전사를 키워내기 위했던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석과불식'은 주역의 한 구절이자 신 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마지막 장에 언급된 말로, 신 교수는 이에 대해 "석과는 가을에 나뭇가지 끝에 하나 남겨 둔 '씨 과일'로 씨가 새싹으로 돋고 또 나무가 되고 또 숲이 되는 것처럼 석과불식은 사람을 키우는 일"이라고 해설한다.
A씨는 "사람들이 석과불식의 의미를 잘 모르는데, 주역의 석과불식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라면서 "신 교수가 그런 해설을 붙여놓은 의도를 보면 자신은 은연자중하면서 붉은 전사들을 길러내는 일에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혁명 전사를 길러내기 위한 좋은 방법으로 현실 운동권에 참여하지 않고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 교수는 출소 이후 시민사회 활동 등에 대한 다양한 요구를 받아왔지만 번번이 거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A씨는 "혁명역량의 저변 확대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 자부함으로써 당시 종북좌파 내부에서 거세게 일어나고 있던 요구, 즉 이젠 사색을 그만하고 현실 변혁운동에 적극 동참하라는 요구를 거절하는 논리로 개발한 것이 석과불식이었다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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