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에 놀아나면 전쟁 나고 전쟁 각오해야 평화 온다
<자유경제스쿨>북의 대령살상무기가 겨냥하는건 남한 인민
햇볕 정책은 1998년 2월 김대중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국내외에 선포한 남한의 대북 정책이다. 그 골자는 퍼주기였다.
작명의 허술함 때문에 햇볕정책이란 이름은 거품 꺼지듯 사라져 갔으나 좌파인 노무현은 말할 것 없고, 우파라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도 사실상 그 노선은 계속되었다. 강력한 추진 장치가 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개성 공단 철수 결정 이전에도 박근혜 정부의 대북 대응에는 단호하고 간명한 원칙이 서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정부의 드레스덴 선언,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통일 대박론 등은 이름을 갈아 붙인 햇볕 정책에 다름이 없었다. 그 추진 장치란 다름 아닌 ‘통일’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고 노래 부르는 남북통일 말이다.
20세기 한국사는 식민지화와 분단이라는 두 가지의 극단적인 수치를 겪었다. 일제 지배가 끝나고 해방이 찾아 왔을 때 이번에는 그것이 분단으로 직결되는 것을 보게 되자 타민족의 지배 밑에서 비로소 배태되었던 민족의식이 넘쳐나게 되었다. 그 후 통일은 민족의 성취 목표가 되었다. 통일과 민족주의는 북에서 더 먼저 그리고 더 강하게 구호로 삼았으므로 남에게는 약점이 되었다. 바둑으로 치면 적어도 선수 후수의 차이가 생기고, 실제로 남쪽은 북의 손 따라 두는 국면에서 오랫동안 헤어나지 못 했다.
남쪽은 이 희극에서 조롱감 역을 톡톡히 맡아 했다. 북의 김일성 세습 독재 권력의 내부적 인민 탄압과 경제적 빈곤, 외부적 대남 도발이 모두 통일을 위한 것으로 오히려 미화되곤 해도 남은 그에 대한 효과적인 반격을 못했다. 비록 통일지상주의는 아닐지라도 행여 반통일적이라고 책 잡힐까봐 통일이라는 단어 앞에서 안절부절 못해 온 것이 남한의 전반적 정치 감각이었다. 통일, 더구나 평화통일이라는 허위감정(虛僞感情)은 대북 퍼주기의 추진 장치 노릇을 하기에 족했다.
북의 이번 핵폭탄과 장거리 미사일 실험 강행과 그 성공은 남한을 환상에서 매우 늦게나마 깨어나게 하고 있다. “살려면 죽고 죽으려면 산다”라고 한 이순신적인 사고 전환이 필요하다. “평화를 쫓다보면 전쟁이 나고, 전쟁을 각오해야 평화를 지킨다.”
북의 대량살상 무기와 운반 시스템은 그 표적이 남한 외에는 따로 없다. 북은 입으로는 평화통일을 부르짖어 왔으나 속으로는 일관되게 무력 통일을 추구하고 있다. 국제 정세는 어느 때라도 변할 수 있으므로 미국이 한미동맹조약에 따른 핵우산을 제공할 수 없는 그런 기회만 생기면 핵무기를 앞 세워 남을 일거에 정복해 버리겠다는 것이 그것이다.(이런 기회는 생각보다 쉽사리 닥칠 수 있다.)
북이 남한을 평화적으로 통일할 수 없는 것은 남의 인민 각자가 향유하는 자유를 저항 없이 내 놓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이 북을 평화적으로 통일할 수 없는 것은 북의 세습 권력이 자신의 권력을 순순히 포기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남한 인민이 누리는 개인의 자유는 남한 사회가 이루어 내고 있는 경제적 번영, 문화적 자기실현, 정치적 정의 구현이라는 모든 매크로 창발 특성(emergent property)의 원천이다. 자유냐 통일이냐를 놓고 저울에 달면 통일은 허위이고 자유는 진실이다.
남한 사회는 미구에 북한을 외면하고 통일을 포기하는 쪽으로 진화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세습 권력은 그렇게 할 수 없다. 통일은 그들의 존재와 존재 양식을 정당화하는 최대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자유에는 평화, 민주주의, 법치(法治)의 3가지가 기반으로 필요하다. 북한의 세습 독재 권력에게는 자유 자체는 말할 것도 없고 이 3가지의 하나 하나가 남한의 안보를 받혀주는 치명적 독약이다. 평화를 유지하면서 통일도 바라볼 수 있는 운수 좋은 경우로서 북한 세습권력의 완벽한 자멸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운수소관이니까 길게 말하지 말자.
마찰 상황에 있는 두 당사자 가운데 진정으로 평화를 원하는 쪽이 있다면 그가 먼저 도발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남북 두 당사자 가운데 남한은 그런 당사자다. 그러나 상대편이 도발을 감행해 올 때는 다르다.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 갚되, 갚는 것이 받은 것보다 더 커야, 이 주고 받기에 부(負)의 피드백이 일어나서 평화가 회복된다. 이는 섣불리 정(正)의 피드백이 확대되지 않도록 그 보복이 충분히 커야 함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개성 공단 철수는 그 시작에 불과하다는 대통령의 선언은 올바른 것이다. 비록 남한 자체가 핵무기를 스스로 보유하는 데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동맹국의 전략적 핵우산 가동 시험이나 단거리 전술 핵무기와 사드 등 방어 무기의 국내 배치는 충분한 규모로 즉시 실행해야 할 것이다.
글/강위석 시인·경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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