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 '철회인듯 철회 아닌 철회같은 철회'?
야당 협조 없인 정국 수습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듯
정가 "사실상 2선 후퇴…국민 지지 없어 외치도 제대로 못해"
야당 협조 없인 정국 수습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듯
정가 "사실상 2선 후퇴…국민 지지 없어 외치도 제대로 못해"
박근혜 대통령이 8일 ‘김병준 철회' 카드를 내민 것은 사실상 ‘2선 후퇴’를 의미한다는 분석이다. 이러한 행보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인해 퇴진·탄핵 여론이 비등한 상황에서 야당의 협조 없이는 사태 수습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깔린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은 이날 오전 국회에서 정세균 국회의장과 13분 간 회동해 ‘국회 추천 총리’ 수용 의사를 밝혔다. 사실상 김 내정자 지명 철회 수순에 돌입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정 의장에게 “국회가 총리를 추천해 준다면 총리로 임명해 내각을 통할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김 내정자 지명 철회는 야당의 ‘영수회담’ 전제 조건이다. 박 대통령이 지난 2일 참여정부 핵심인사였던 김 내정자를 ‘책임 총리’로 내정하면서 야당의 반발은 심화됐다. 야당은 박 대통령의 국회 방문 전에도 ‘김 내정자 철회가 우선되지 않은 한 영수회담은 없다’는 의사를 표명한 바 있다.
이 때문에 박 대통령의 발언은 꼬일 대로 꼬인 정국 상황에 지지율까지 한 자리수로 곤두박질치자 야당의 협조 없이는 ‘최순실 정국’을 타개할 수 없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오는 10일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고, 12일 대규모 3차 촛불집회가 예고돼 있는 상황임에 따라 늦어도 9일까지는 야당과 협의를 마쳐야 한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야당과 정국 수습안을 도출하지 못한다면 정권은 회복불능 상태로 내몰릴 수 있다는 우려인 것이다. 야권이 박 대통령과의 만남을 사전 거부했음에도 ‘무조건’ 정 의장을 찾은 것은 그만큼 시급하다는 증거다. 박 대통령은 정 의장과 만난 자리에서 “대통령으로서 저의 책임을 다하고 국정을 정상화시키는 것이 가장 큰 책무라고 생각해서 오늘 이렇게 의장님을 만나러 왔다”고 했다.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기자들과 만나 “대통령으로서는 야당의 요구사항을 전폭적으로 수용한 것”이라며 “지금 국가적인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정국 정상화를 위해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어려운 결정을 했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평론가도 본보에 “야당이 뿌리치더라도 박 대통령이 계속 만남을 시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외통수에 몰린 상황을 조금이나마 타개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박 대통령이 야당의 요구인 ‘2선 후퇴’를 사실상 수용했다고 분석한다.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김병준 카드’를 버리고 입법부 수장을 만나 총리 인선문제를 협의한다는 것 자체가 권력 질서의 ‘재정립’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본보와 통화에서 “10여 분의 짧은 순간이었지만 박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의 자존심을 굽힌 것”이라며 “12일 대규모 촛불 집회를 굉장히 의식했다고 볼 수밖에 없으며, 버티기 힘든 상황을 본인이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거의 모든 권한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결국 2선 후퇴가 될 수밖에 없음을 스스로 인정했다”며 “다만 이 같은 상황에서 국회가 총리를 지명하면 박 대통령은 국민의 지지가 기반되지 않는 이상 실질적으로 외치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야권에서는 박 대통령의 ‘2선 후퇴’ 입장이 모호하다는 지적이다.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내각지명권을 준다는 것인지, 청와대가 내정에 간섭 안한다는 것인지 불분명해서 정 의장이 거듭 물어봤는데 분명히 안하고 가버렸다”며 “내각 지명권을 주고 청와대가 내정문제에 간섭 안하겠다고 말하는 게 어렵나”라고 따졌다. 손금주 국민의당 수석대변인은 브리핑에서 “대통령은 총리 지명과 관련해 전권을 주겠다고는 했지만 2선 후퇴는 없다는 식으로 모호한 입장을 드러냈다”고 비판했다.
이 때문에 탄핵 및 하야 요구는 이전보다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여야의 총리 인선 합의 및 대통령 권한 행사 범위 등을 놓고 국회 논의 과정에서 진통이 예상된다. 현재 여당 지도부는 '2선 후퇴'의 의미를 박 대통령이 외교·안보 등 ‘외치’만 챙기고 ‘내치’에 대해서는 모든 권한을 책임총리에게 넘기는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야당은 책임총리가 내·외치 모두 아우르고 박 대통령은 국가원수의 상징성만 띄고 외교적 의전만 맡는 방식에 무게를 두고 있어 향후 논의과정에서 논란이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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