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안 가결 이후 대통령 대행 '권한'은 어디까지?
'대통령 직무 정지' 외 범위·기간 규정은 전무
야당“권한대행은 현상유지 수준에만 머물 것" 기대
국회가 내달 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 표결을 앞둔 가운데, 향후 대통령 권한대행의 구체적인 직무 범위에 대한 문제가 새로운 쟁점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그간 국회추천 총리 문제로 신경전을 벌이던 야3당이 일단 탄핵에 전력을 쏟기로 합의한 데 이어 김무성 새누리당 전 대표를 비롯한 여당 비주류도 탄핵 추진에 동참 의사를 밝힌 만큼, 실제 탄핵안이 가결될 가능성도 높아진 상태다. 또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은 탄핵소추안 발의에 필요한 200명 이상 확보를 목표로 비박(비박근혜)계와 활발히 물밑 접촉을 벌이고 있다.
헌법 제65조 3항에 따라 국회가 탄핵소추를 의결하면, 대통령의 직무는 곧바로 정지된다. 이후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있을 때까지는 권한행사를 할 수 없는데, 헌재는 최대 180일 간 탄핵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이처럼 대통령이 궐위되거나 사고로 인하여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에는 국무총리, 법률이 정한 국무위원의 순서로 그 권한을 대행한다.(헌법 제71조)
즉, 내달 9일 탄핵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할 경우, 박근혜 대통령은 그 직후부터 최대 6개월 동안 대통령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의미다. 대신 그 기간 동안 황교안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권한을 수행하게 된다.
앞서 야권에선 박 대통령의 대리인격인 황 총리의 권한대행을 반대해왔다. 국민의당이 ‘선 총리 추천, 후 사퇴 또는 탄핵’을 주장하며 민주당과 날을 세운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신임 총리 추천 문제로 이슈가 넘어갈 경우, 촛불민심에도 역행할 뿐더러 탄핵 정국이 흐트러질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야권은 ‘선 탄핵’으로 기조를 재정립했다.
문제는 탄핵 가결 직후 대통령 권한대행의 직무 범위다. △권한대행인 총리가 구체적으로 어느 범위까지 직무를 수행할지 △대통령의 권한은 어느 수준까지 제재를 받는지 △권한대행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기간은 최장 얼마인지에 대해 명확한 규정도, 선례도 없기 때문이다.
역대 헌정사에서 총리 등이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한 사례는 총 네 번이다. 가장 먼저 1960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사임으로 허정 외무부 장관이 권한을 대행했고, 1962년 윤보선 전 대통령이 사임한 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을 대신했다. 또 1979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 피살 후 최규하 국무총리가,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의결 후 고건 총리가 대통령 권한을 대행했다.
하지만 직무 범위에 대한 법적 규정이 불충분해 권한대행 때마다 논란이 인 바 있다. 고건 당시 총리는 탄핵 가결 직후 관련 규정이 없어 “권한대행은 상식과 원칙에 따라서 수행하겠다”는 다소 애매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규정 없이 해석만 난무, '그림자 권한대행' 머물 가능성 커
현재로서는 헌법학계에서 내놓은 갖가지 해석만 존재하는 상황이다. 통설은 임명직 공무원인 총리가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과 동일한 권한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에, 최악의 국정 마비를 막는 범위 안에서 제한적인 권한만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총리가 국무위원 등 고위직을 임명하거나 외교 협정 및 조약을 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연히 대통령의 이념적 성향이나 기존의 노선과 다른 정책을 집행할 수도 없다.
실제 가장 최근에 권한 대행을 한 고건 전 총리의 경우, 다수설에 따라 철저히 제한적 업무만 수행한 케이스다. 차관급 인사를 발표하면서도 총리실 대신 청와대에서 발표하도록 했고, 공적 업무를 제외한 총리실 관련 업무에 대해선 여전히 국무조정실(국무총리 보좌기관)의 보고를 받았다. 외국 대사 신임 외에는 웬만하면 청와대를 찾는 일도 없었다고 한다.
특히 탄핵소추안이 가결돼 황 총리가 권한대행을 하면, 첫 번째 업무는 헌법재판소 재판관 임명 건이다. 탄핵 심판을 관장하는 박한철 소장이 내년 1월로 임기가 만료되는데, 대통령 권한대행인 황 총리가 후임을 임명해야 한다. 하지만 자리를 지키는 수준에 머물렀던 고 전 총리의 전례를 고려할 때, 황 총리 역시 인사권을 행사치 않고 유보할 가능성이 크다.
만약 탄핵심판이 길어지면, 내년 3월 임기가 만료되는 이정미 재판관의 후임도 황 총리가 임명해야 한다. 이때 나머지 7명 중 단 한 명이라도 ‘일신상의 이유’를 들어 업무수행을 못하게 될 경우, 탄핵심판에 대한 심리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심리에 필요한 최소 인원이 재판관 7명이기 때문이다. 설령 나머지 인원 모두 대통령 파면을 심사한다 해도, 현재 재판관들의 전력 등 인적 구성을 고려할 때 7명 중 6명의 찬성을 얻어내기는 쉽지 않다.
"탄핵안 가결돼도 혼선 불보듯 뻔해" 법안 발의 움직임 '꿈틀'
이에 야권 일각에서는 대통령 권한대행의 범위를 법적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민병두 민주당 의원은 25일 ‘대통령 권한대행의 지위 및 역할에 관한 법률안’을 마련해 이르면 내주 초 발의하겠다고 밝혔다.
해당 법안에는 △청와대가 정부로부터 업무보고를 받거나 지시하는 것을 금지하되 △주방, 경호실, 부속실 등 최소업무만 유지하고 △대통령의 급여와 업무추진비 지급은 징계위에 회부된 공직자 수준에 준하도록 정하며 △권한대행이 대통령에게 업무를 보고하거나 지시를 받는 데 대한 강력한 제재조치를 마련하는 내용 등이 담길 예정이다.
아울러 △국무위원과 대법관, 헌법재판관 등에 대한 임명·제청 권한 문제와 △권한대행체제의 유지 기한 △대통령선거 준비 관련 사항 등은 전문가 토론회를 거쳐 새로이 규정을 만들 계획이라고 민 의원은 밝혔다.
이와 관련해 판사 출신인 송기석 국민의당 의원도 이날 본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현행대로라면 권한대행이 현상유지만 하는 수준에 머물 것"이라며 "지금은 관련 규정도 없고, 학계의 통설 상 내재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문제의식에 공감했다.
이어 “황교안 총리도 고건 총리보다 더 소극적으로 현상유지만 할 뿐, 결코 그 선을 넘어서지 않을 거라 본다. 탄핵안이 가결된다 해도 권한대행 범위 문제가 계속 쟁점이 될 것"이라며 관련 규정에 대한 조속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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