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만해?] 잊어서는 안 될 아픈 역사 '눈길'
김영옥·김새론·김향기 주연
위안부 소재 영화…3·1절 개봉
위안부 소재 영화 '눈길' 리뷰
3·1절 개봉…김새론·김향기 주연
1944년 일제 강점기 말. 같은 마을에 사는 종분(김향기)과 부잣집 딸 영애(김새론)는 집안 환경과 성격이 다른 동갑내기 소녀다. 종분은 가난하지만 밝고, 부잣집 막내딸인 영애는 똑똑하고 당차다.
종분은 예쁘고 부족함 없이 자란 영애가 부럽다. 영애의 오빠 영주가 선물로 준 책을 받은 종분은 학업에 대한 꿈을 키우고 영애처럼 일본 학교에 가고 싶다는 소망을 품는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집을 비운 사이 남동생과 단 둘이 있던 종분은 집으로 들이닥친 일본군들의 손에 이끌려 낯선 열차에 몸을 싣게 된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종분은 또래 아이들이 가득한 열차 안에서 두려움에 떤다. 그때 마침 일본으로 유학 간 줄 알았던 영애가 열차 칸 안으로 던져진다.
낯선 땅 만주의 한 일본군 부대로 끌려간 이들 앞에는 지옥보다 더한 현실이 펼쳐진다.
영화 '눈길'은 대한민국의 가장 아픈 역사인 위안부를 소재로 했다. 2015년 삼일절을 맞아 KBS에서 동명의 2부작으로 먼저 선보인 작품으로, 극장용 버전으로 별도 제작했다. 해외에서 먼저 알아본 작품이다. 제37회 반프 월드 미디어 페스티벌 최우수상, 제 24회 금계백화장 최우수 작품상과 여우주연상(김새론), 제67회 이탈리아상에서 대상인 프리 이탈리아상을 수상했다.
종분의 눈으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이 영화는 아프고 끔찍한 역사의 한 장면을 직접 묘사하지 않는다. 폭력적인 장면을 최대한 배제한 점이 특징이다. 미성년 배우들에 대한 배려이자,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은 아픔을 영화적 볼거리로 표현하지 않겠다는 이 감독의 의지였다.
피해자들의 아픔과 상처는 종분과 영애의 말과 표정으로 오롯이 전달된다. 평범한 두 소녀가 참혹한 현실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견디는 장면을 보노라면 가슴이 내려앉는다. "죽는 게 두렵니? 죽지 못해 사는 게 더 무섭지", "너무 힘들면 말도 안 나와"라는 대사엔 시대의 아픔과 슬픔이 담겨 있다. 누구도 가늠할 수 없는, 치유할 수 없는 상처는 관객들을 울린다.
열다섯 꽃다운 나이에 영문도 모른 채 일본군에 짓밟힌 소녀들의 이야기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게 영화의 메시지다. 소녀들의 울부짖음과 공포, 절망을 누가 알고 보상해줄까. 영화를 가득 채운 새하얀 '눈길'은 이들이 겪은 고통의 크기를 극대화한다.
대한민국의 어두운 역사를 다뤘지만 마냥 절망적이지 않다. 고통 속에서도 서로를 의지한 두 소녀의 우정을 통해 희망과 연대를 이야기한다. "난 한 번도 혼자라 생각해본 적 없다. 네가 살아야 내도 산다"는 종분의 담담한 고백에는 절망 끝에서 길어 올린 따뜻한 위안이 엿보인다. 자신의 상처가 부끄럽다는 종분에게 한 여고생이 건넨 "부끄러워할 이유 없다"는 말은 위안부 피해자들을 조금이나마 어루만져 준다.
류보라 작가는 "더 늦기 전에 해야 하는 일이라서 이야기를 썼다"면서 "'끔찍한 상황을 견딜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주변에 나와 같은 친구, 나의 아픔을 알아주는 사람들,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한 분이라도 이 영화를 더 봤으면 한다"며 "지금도 여전히 힘든 이웃이 있다는 것, 과거의 문제들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남자'(2012), '오 마이 비너스'(2016), '백희가 돌아왔다'(2016) 등을 공동 연출한 이나정 감독이 메가폰을 들었다.
류 작가의 기획 의도에 끌렸다는 이 감독은 "위안부에 대한 여러 자료 중 소박한 일상에 대한 그리움이 담긴 당시 소녀들의 바람을 적은 기록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면서 "'집에 가면 노래를 부르고 싶다', '엄마가 보고 싶다', '좋아하는 오빠와 결혼하고 싶다', '공부를 해서 선생님이 되고 싶다' 등 평범한 바람들을 읽은 후 멀게만 느껴지던 역사적 비극이 피부로 와 닿아 가슴이 아팠다"고 설명했다.
연출 포인트에 대해선 "끔찍한 폭력의 순간을 '영화적 장치'로 이용하지 않으려고 신경 썼다. 그 폭력으로 아픔을 겪은 분들이 계시고, 이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시점에서는 더욱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다들 위안부 문제가 이미 알고 있는 문제라고도 생각하는데, 작품을 만들면서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 게 과연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됐다. 평범한 사람들이 겪게 된 거대한 비극, 그리고 그 안에서 느꼈던 따뜻함을 새로운 시각으로 봐주셨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김새론과 김향기는 어려운 소재를 온몸으로, 용기 있게 연기했다. 김새론은 "내가 잘 표현할 수 있을지 굉장히 많이 고민했다"며 "모두가 알아야 하는 이야기이고, 누군가는 꼭 표현해야 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서 용기 내 출연했다"고 했다.
김향기는 "감히 어떻게, 그분들의 고통과 아픔을 잘 담아낼 수 있을까 걱정했다"며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과거의 사실들을 담고 있는 작품이고,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서 참여하게 됐다"고 했다.
영화는 마지막 자막으로 "2017년 1월1일 현재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한 239분 중 199분이 돌아가시고 40분만이 생존해 있다"고 말한다. 지난 18일 중국에 살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별세해 생존자는 39명으로 줄었다.
3월 1일 개봉. 117분. 15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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