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금과 생활비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가난한 ‘고학생’의 하루하루에서 대학 생활의 낭만을 찾는 것은 ‘사치’나 다름없었다.
2학년 1학기를 마칠 무렵, 그는 군 입대를 결심한다.
‘군에 들어가면 의식주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테고, 또 힘겨운 현실에서 벗어나 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청년’ 이명박은 군대에 갈 수가 없었다.
“젊은 사람 몸이 이렇게 될 때까지 뭐했나. 군대가 요양소인 줄 아나.”
신체검사 결과, ‘기관지 확장증’에 ‘악성 축농증’까지….
몸이 아프고 기침이 나도 한낱 감기 정도로만 여기고 넘긴 탓에 군대조차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처지가 돼버린 것이다.
청년 시절의 이명박 후보.
집으로 돌아온 이 후보를 보고 어머니는 “네 몸이 군대에도 못 갈 정도로 아픈 줄 몰랐다. 어릴 때 술지게미만 먹여 키워서 그런가 보다. 아플 때 약 한 첩 제대로 못 먹인 어미 탓이다”며 자책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후보는 “남들 다 가는 군대를 가지 못해 어머니 마음을 아프게 한 게 더 죄송스러웠다”고 그 당시를 떠올렸다.
“그날 저녁 어머니는 다른 식구들이 오기 전에 서둘러 밥을 지으셨다. 상 위에는 우리 식구가 1년에 한두 번 먹을까 말까 한 흰쌀밥과 날계란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나는 갓 지은 밥에 날계란을 깨뜨려 비벼 먹는 걸 어려서부터 가장 좋아했다. 흰쌀밥과 계란을 앞에 놓고 나도 울고 어머니도 울었다” - 이명박, <어머니>(2007) 중에서
"어머니가 처음 나를 인정한 그날을 잊을 수 없다."
포항 시장통 출신 ‘촌놈’ 이명박의 ‘도전’은 계속됐다.
고려대 재학 당시 친구들과 교정에서. 맨 윗줄 가운데가 이명박 후보.
대학 3학년이던 1963년 말, 혈혈단신으로 상과대 학생회장 선거에 나섰다.
오로지 “나 혼자만의 세계를 벗어던지고 세상 속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동기생 친구들부터 “네가 취하지도 않았는데 웬 헛소리냐”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 후보 스스로도 “막상 후보 등록을 하고 나자 내 초라한 처지가 다시 한 번 확인됐다. 비록 단과대학 선거였지만 사회의 선거를 뺨칠 정도였고, 난 지명도나 그동안의 리더십, 조직과 자금력 어느 것 하나 자신 있는 게 없었다”고 밝히고 있을 정도.
오히려 1~2학년 후배들이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선거운동 막판에는 “어차피 안 되는 거, 선거 비용을 모두 변상해줄 테니 포기하라”는 상대 후보 측의 회유도 있었다.
‘쓴 돈’도, 또 ‘쓸 돈’도 없었지만 결과는 40여 표의 근소한 차로 이 후보의 ‘승리’였다.
“내 생애의 대전환은 이렇게 시작됐다. 나는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학생회장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 이명박, <신화는 없다>(2005) 중에서
이듬해 6월 단과대 학생회장단의 자격으로 한·일 국교 정상화 회담 반대 시위에 나선 이 후보는 ‘주동자’로 몰려, 내란선동죄 등의 혐의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케 된다.
6.3시위 주동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이명박 후보(맨 앞줄 왼쪽에서 세번째).
이 후보가 석방되기 두 달여 전 어머니가 처음으로 면회를 왔다.
“명박아, 난 네가 별 볼 일 없는 놈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너야말로 대단한 놈이더구나. 소신대로 행동하거라. 어미는 널 위해 기도하고 있다. 네 소신이 옳다고 생각한다.”
흰색 저고리 차림의 어머니는 이 말만을 남긴 채 되돌아갔다.
그리고 3개월 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이 후보는 당시 기억을 떠올리며 “어머니가 처음으로 나를 인정한 것이었다. 그날을 잊을 수 없다”고 되뇌곤 한다.
어쩌면 그가 ´전과자´ 신분에도 낙담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던 데는 바로 어머니의 ‘인정’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