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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눈물, 그리고 내 인생의 전환´


입력 2007.09.22 10:19 수정        

<데일리안 대선기획> ´유력 대통령후보, 그는 누구인가´ 이명박 <4>

´평범치 못한´ 대학 생활, ´포항 촌놈´ 이명박의 도전은 계속됐다

한나라당 이명박 대통령후보(자료사진).

"남들 다 가는 군대를 가지 못해 어머니도 울고 나도 울었다."

대학 입학의 꿈이 실현되긴 했지만, 이명박 후보의 생활은 ‘평범한 대학생’들과 달랐다.

그의 하루는 여전히 매일 새벽 4시부터 이태원 시장 청소로 시작됐다.

등록금과 생활비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가난한 ‘고학생’의 하루하루에서 대학 생활의 낭만을 찾는 것은 ‘사치’나 다름없었다.

2학년 1학기를 마칠 무렵, 그는 군 입대를 결심한다.

‘군에 들어가면 의식주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테고, 또 힘겨운 현실에서 벗어나 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청년’ 이명박은 군대에 갈 수가 없었다.

“젊은 사람 몸이 이렇게 될 때까지 뭐했나. 군대가 요양소인 줄 아나.”

신체검사 결과, ‘기관지 확장증’에 ‘악성 축농증’까지….

몸이 아프고 기침이 나도 한낱 감기 정도로만 여기고 넘긴 탓에 군대조차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처지가 돼버린 것이다.

청년 시절의 이명박 후보.

집으로 돌아온 이 후보를 보고 어머니는 “네 몸이 군대에도 못 갈 정도로 아픈 줄 몰랐다. 어릴 때 술지게미만 먹여 키워서 그런가 보다. 아플 때 약 한 첩 제대로 못 먹인 어미 탓이다”며 자책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후보는 “남들 다 가는 군대를 가지 못해 어머니 마음을 아프게 한 게 더 죄송스러웠다”고 그 당시를 떠올렸다.

“그날 저녁 어머니는 다른 식구들이 오기 전에 서둘러 밥을 지으셨다. 상 위에는 우리 식구가 1년에 한두 번 먹을까 말까 한 흰쌀밥과 날계란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나는 갓 지은 밥에 날계란을 깨뜨려 비벼 먹는 걸 어려서부터 가장 좋아했다. 흰쌀밥과 계란을 앞에 놓고 나도 울고 어머니도 울었다” - 이명박, <어머니>(2007) 중에서

"어머니가 처음 나를 인정한 그날을 잊을 수 없다."

포항 시장통 출신 ‘촌놈’ 이명박의 ‘도전’은 계속됐다.

고려대 재학 당시 친구들과 교정에서. 맨 윗줄 가운데가 이명박 후보.
대학 3학년이던 1963년 말, 혈혈단신으로 상과대 학생회장 선거에 나섰다.

오로지 “나 혼자만의 세계를 벗어던지고 세상 속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동기생 친구들부터 “네가 취하지도 않았는데 웬 헛소리냐”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 후보 스스로도 “막상 후보 등록을 하고 나자 내 초라한 처지가 다시 한 번 확인됐다. 비록 단과대학 선거였지만 사회의 선거를 뺨칠 정도였고, 난 지명도나 그동안의 리더십, 조직과 자금력 어느 것 하나 자신 있는 게 없었다”고 밝히고 있을 정도.

오히려 1~2학년 후배들이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선거운동 막판에는 “어차피 안 되는 거, 선거 비용을 모두 변상해줄 테니 포기하라”는 상대 후보 측의 회유도 있었다.

‘쓴 돈’도, 또 ‘쓸 돈’도 없었지만 결과는 40여 표의 근소한 차로 이 후보의 ‘승리’였다.

“내 생애의 대전환은 이렇게 시작됐다. 나는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학생회장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 이명박, <신화는 없다>(2005) 중에서

이듬해 6월 단과대 학생회장단의 자격으로 한·일 국교 정상화 회담 반대 시위에 나선 이 후보는 ‘주동자’로 몰려, 내란선동죄 등의 혐의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케 된다.

6.3시위 주동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이명박 후보(맨 앞줄 왼쪽에서 세번째).

이 후보가 석방되기 두 달여 전 어머니가 처음으로 면회를 왔다.

“명박아, 난 네가 별 볼 일 없는 놈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너야말로 대단한 놈이더구나. 소신대로 행동하거라. 어미는 널 위해 기도하고 있다. 네 소신이 옳다고 생각한다.”

흰색 저고리 차림의 어머니는 이 말만을 남긴 채 되돌아갔다.

그리고 3개월 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이 후보는 당시 기억을 떠올리며 “어머니가 처음으로 나를 인정한 것이었다. 그날을 잊을 수 없다”고 되뇌곤 한다.

어쩌면 그가 ´전과자´ 신분에도 낙담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던 데는 바로 어머니의 ‘인정’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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