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 모성애를 그린 영화 ‘하모니’에서 홍정혜(김윤진 분)와 김문옥(나문희 분)은 남이었지만 가족만큼이나 깊은 사이가 됐다. 두 사람은 10년 뒤 영화 ‘담보’에서 모녀 사이로 등장하는데,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모녀라는 게 전혀 낯설지 않다.
따뜻한 부성애를 그린 영화 ‘담보’에서 박두석(성동일 분)은 채권자의 딸 승이(어린 시절 박소이 분, 하지원 분)를 처음엔 담보처럼 맡았지만 이내 딸로 입양해 가족이 된다. 원사와 사병으로 처음 만난 종배(김희원 분)와도 이미 형과 아우처럼 지내다 승이가 합류하면서 2대가 함께 사는 ‘가족’이 됐다.
두 작품은 모두 감독 강대규가 시나리오를 각색하고 영화를 연출했다. 모성애와 부성애, 가족의 정을 다룬 점도 비슷한 결이지만, 가족이 아닌 사람들이 가족이 되는 모습을 통해 가족을 가족이게 하는 무엇,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탐색을 이어나가고 있다.
강대규 감독은 영화 ‘그놈은 멋있었다’(2004), ‘형사: Duelist’(2005), ‘첫사랑’(2008), ‘해운대’(2009)에서 연출부, 조연출, 조감독 역할을 하며 영화 연출의 실재를 익힌 강대규 감독은 2010년 ‘하모니’를 연출했고 흥행과 화제성에서 성공했다. 감독으로 데뷔전을 치른 뒤에도 영화 ‘히말라야’(2015)와 ‘공조’(2016)를 각색했고, 이번에 두 번째 연출작 ‘담보’(감독 강대규, 제작 JK필름, 배급 CJ엔터테인먼트)를 세상에 내놓았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라는 흥행의 엄청난 악재를 만난 상황에서도 133만 관객을 울리며 손익분기점 170만을 향해 차박차박 걷고 있다.
“영화 ‘하모니’ 때 한 번 해보니 모성, 한 번 더하면 잘할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남남이지만 부성에 관한 이야기, 아버지가 되어가고 딸이 되어가고 가족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저는 영화 시작할 때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 생각했거든요. 학창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난 다음 그 그리움 때문에, 감독이 되면 먼저 엄마에 관한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 했었어요. 그게 ‘하모니’가 됐고요. 몇 해 전 아버님이 아프셨는데 그때의 감정이 ‘담보’로 이어졌습니다.”
서울 삼청로 카페에서 만난 강대규 감독의 말이다. 강 감독에게 ‘담보’를 보며 피를 나누지 않은 사람들이 가족이 되어가는 모습을 그린 일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이 연상됐다는 얘기를 건넸다. 고레에다 감독은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처음 만난 이복동생과 가족이 되어가는 ‘바닷마을 다이어리’, 출생 당시 아이가 뒤바뀐 걸 뒤늦게 알게 된 아버지가 혈육을 만나 시간을 보내면서 비로소 길러 온 아이에게도 진정한 아버지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통해 가족에 관한 탐구를 이어왔다. 특히 ‘어느 가족’에 이르러서는 현대사회 병폐의 원인을 가족의 해체에서 찾음과 동시에 혈육이든 아니든 가족이라는 공동체에서 해답을 모색했다.
아무리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탄 영화라고 해도, 타 작품과 자신의 영화를 연결하는 걸 반기는 감독은 없다. 하지만 강대규 감독은 전혀 꺼리지 않고 질문의 의도를 있는 그대로 선하게 받아들였다.
“영화를 가족 안에서 풀어가려 한다는 게 고집이거나 소명이라는 게 아니에요. 다양한 이야기를 해나가는 데 있어 기제로, 혹은 그 기저에 깔고 있는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는 거죠. 예를 들어 휴먼드라마를 만들고자 한다면 그게 주이고, 거기에 가족 이야기가 들어 있는 거죠. 그분(고레에다 히로카즈)처럼 인생에 혜안을 가지고 사회성을 가지고 풀어내지 못했지만 이기주의가 팽배한 이 시점에 가족이라는 것, 소외 받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그 인물이 가정 안에서 커나가는 의미, 이런 것들을 풀어내는 것이 ‘담보’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가족은 앞으로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을 겁니다.”
두석과 종배의 티격태격 가정에 환한 등불이 되어 따스함을 채워 준 사람은 승이다. 승이 덕에 세 사람은 더욱 각별한 가족이 됐다.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의 눈물을 빼는 주인공도 승이다. 특히 어린 승이를 연기한 배우 박소이는 영화 ‘담보’의 보물이다. 때 묻지 않은 연기, 계산이 아니라 본능적 감성으로 만들어낸 승이의 표정과 말투와 움직임은 관객을 한껏 웃게 하다가 펑펑 울게 한다. 성동일, 김희원, 하지원, 김윤진, 김재화 그리고 나문희 등 다른 성인들이야 연기 잘하기로 정평이 난 배우들이라 걱정 없지만, 자칫 비중 큰 어린 승이의 역할에 따라 영화의 승패가 좌지우지될 수 있었다.
“어린 승이 역할 캐스팅에 가장 공을 들였어요. 촬영 직전까지 못 찾아서 고민이었죠. 저한테는 선생님 격인 윤제균(조감독을 한 영화 ‘해운대’ 당시 감독이자 ‘담보’ 제작자) 감독에게 ‘못 찾겠어요’라고 말씀드렸어요. 윤 감독께서 마침 ‘귀향’ 아역 오디션에서 봤는데 영화가 무산돼 못 쓴 배우가 있다, 너무 출중했다고 하시는 거예요. ‘담보’ 오디션 마지막 시간에 순서를 놓고 봤어요. 학원에서 배운 듯한 연기가 아닌 본능에 가까울 정도로 상황에 몰입해 잘하는 거예요, 섬세하게 표현도 잘하고요. 촬영 들어가니까 역시 잘하더라고요. 영화에서 보면 승이 혼자 전화기 가져와서 뒷방에서 하는 독백 신 있잖아요, ‘엄마, 나 데리러 올 거지?’ 그 장면 연기할 때도 집중해서 하는데, 이 아이 말을 관객이 듣는 거잖아요. 마음으로 우리가 데리러 가는 거죠, 그 마음이 들게 정말 잘했어요.”
‘착한’ 영화처럼 느릿느릿한 말투로 선하게 얘기하는 감독이다 보니 어린 승이에 대한 칭찬은 어른 승이에게로 이어졌다.
“하지원 배우가 또 잘 이어준 공도 크죠. 영화는 순서대로 찍을 수가 없는데, 이야기상에선 어린 시절 다 겪은 뒤 지원 씨로 이어지는 거잖아요. 어린 시절의 연기를 보고 자신이 그에 맞추더라고요, 선배답게, 프로답게. 사실 지원 씨 같은 경우, 엄마를 만나는 옌볜 신이 첫 촬영이었어요. 감정이 고조된 장면을 첫 연기로 찍어야 했던 거죠. 정서적 준비를 해 와도 쉽지 않은 상황, 촬영 전에 ‘이 신을 위해 음악을 준비해 놓은 게 있느냐’ 묻더라고요. MP3에 담아 주었죠. 어린 승이 연기도 미리 확인하고, 음악도 챙기고, 끊김 없이 노력해 준 덕에 두 사람에 의한 한 인물의 역할이 끊김 없이 잘 이어졌습니다.”
승이 얘기는 승이 아빠로 이어졌다. 개인적으로 웃음기 지운 성동일의 연기를 좋아한다. 남에게 웃음을 주는 배우의 바탕엔 비극의 감수성, 정극 연기가 있다. 배우는 정극 연기를 하는데 관객은 웃을 때 웃음소리가 커진다. 그냥 웃긴 게 아니라 비감이 내재해 있을 때 웃음소리는 공허하지 않고 실하다. 그런 연기가 가능한 게 성동일이다.
“두석 역할을 할 수 있는 배우, 그 나이 대의 스펙트럼 넓지 않아요. 그 아저씨를 표현해 줄 배우가 많지 않아요. 후보가 많지 않았고, 저를 포함해서 모든 스태프가 성동일 배우가 1순위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성 배우께서 거절하면 그다음을 생각하더라도, 우선을 차선책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어요. 소화를 잘해 내실 거라는 건 믿었는데, 직접 해보니 상대 배우를 잘 받쳐 주세요. 연극이 기본 베이스다 보니, 연극은 라이브다 보니, 상대 대사를 듣고 나서 반응하는 걸 잘하세요. 상대 연기에 따라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감정과 발성 표현이 달라지는 배우, 자유자재로 움직이시더라고요. 이번에 조역과 단역에도 연극 오래 한 배우들을 캐스팅했어요. 오디션도 봤지만, 전체 분위기 안에서 모든 배우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도록, 캐스팅 때부터 노력했습니다.”
대화를 나눌수록 영화가 왜 이렇게 착하게 나왔는지, 감독의 결이었구나, 심성이 전해왔다. 모든 감독 인터뷰에서 심성이 전해오진 않는다, 되레 이성을 공유받는 때가 많다.
“(김)윤진 씨 같은 경우는 ‘하모니’ 때도 보여줬지만 믿음이 가는 배우예요, 틀림없어요. 승이 엄마 역 하겠다고 한 뒤 걱정이 많더라고요. 관객이 자신의 옌볜 사투리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걱정도 하고요. 사투리 선생님과 열심히 연습했어요. 연습벌레예요, 연습벌레, 연습만큼 자기를 보여줄 수 있는 건 없으니까. 짧게 나오지만 강하게 보여줄 준비를 많이 해 왔더라고요. 저는 단지 감정 억제하기를 주문했을 뿐입니다. 흘리지 말고 담아달라, 넘치는 것보다 담고 있는 게 감정이 진솔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다, 말씀 드렸죠.”
“나문희 선생님도 제가 오랜만에 작품 한다 하니 ‘잠깐 나와도 잘 소화해 주겠다’, 먼저 말씀 주시더라고요, 감사하죠. ‘하모니’ 때 두 사람이 남이었지만 엄마와 딸처럼 보였기 때문에 영화에 도움이 됐다고 생각해요. 더 큰 역할, 주도적 역할 할 때 캐스팅 하고 싶지만, 송구스럽지만 부탁드렸습니다.”
종배를 연기한 배우 김희원에 대해선 미안한 마음이 엿보였다. 두석은 먼저 종배와 가족이 됐고, 그런 경험이 있기에 좀 더 빠른 판단 아래 승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영화는 승이가 진정한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것을 통해 두석과 종배가 가족이 된 과정을 미루어 짐작하는 관객도 있고, 그 과정이 없어 아쉬워하는 관객도 일부 있다. 김희원 배우를 좋아하는 이라면 아쉬움이 커질 수 있다.
“두석과 종배의 전사가 없어요, 영화가 그 많은 얘기를 다 담아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콘티 상에는 이야기가 다 있죠. 어떤 분들은 설명이 부족하다고 볼 수밖에 없겠다, 전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봤을 때는 ‘관계를 다 보여주면 감정에 보탬이 됐을 텐데, 왜 이렇게 갔을까’ 하실 수 있어요. 영화는 2시간에 보여줘야 하니까요. 사실 종배는 사연을 가지고 입대했어요, 군에 들어와 죽으려 했는데 두석이가 살려 준 거예요. 목숨을 구해 준 은인으로서, 살아가면서는 멘토로서 동반자로서, 가족이 아니어도 가족처럼 지내고 있는 두 사람이죠. 성향은 다르고 툭탁툭탁 하지만, 거기서 두 사람 관계는 출발했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인물의 배경이 다 설명되면 좋지만, 주인공 중심으로 풀어가다 보니…. 다음에는 압축의 묘미를 살려보겠습니다.”
어떤 얘기를 건네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수긍과 수용의 자세를 보여준 강대규 감독. “다음에는 압축의 묘미를 살려보겠다”는 답에서 ‘전사가 필수냐’고 되묻는 것보다 대범한 마음이 보였다. 가족에 관한 얘기를 하는 감독이 세계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한 명일 필요는 없다. 가족을 진정한 가족이게 하는 무엇에 관한 탐구가 인간성의 회복과 현대사회의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정서를 바탕으로 한 우리 사회의 이야기 속에서 깊어지는 게 우리에게 더 와닿지 않을까. 강대규 감독이 다채로운 틀을 통해 더욱 완성도 있게 가족에 관한 영화적 탐구를 이어가기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