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유동성에도 실물경제는 암울…부동산·증시만 '들썩'
빚에 의존한 자산 시장 호황 '그림자'…거품 붕괴 위기 고조
시중에 풀린 돈이 역대 처음으로 3000조원을 훌쩍 넘어섰지만 실물경기는 좀처럼 회복될 줄 모르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빚으로 일으킨 유동성이 생산적인 영역 대신 부동산과 주식 시장에 쏠리고 있는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하 코로나19) 사태로 내수 시장까지 크게 위축되면서다. 이에 금융권에서는 과도한 부채에 기댄 자산 시장 호황이 어느 순간 무너지는 이른바 민스키 모멘트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는 분위기다.
7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말 원계열·평잔 기준 광의 통화량(M2)은 3152조8116억원으로 전년 말(2912조4341억원)보다 8.3%(240조3775억원)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M2는 현금을 비롯해 요구불예금과 머니마켓펀드, 만기 2년 미만의 정기 예·적금과 금융채 등 곧바로 현금화가 가능한 단기 금융상품들을 포함한 것으로, 넓은 의미의 통화 지표다.
국내 M2가 3100조원은 물론 3000조원을 넘어선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이렇게 풍부해진 유동성의 배경에는 중앙은행인 한은의 완화적 통화정책이 자리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핵심은 빠른 기준금리 인하였다. 코로나19로 급속히 악화된 경제 침체를 저금리 정책으로 떠받치겠다는 계산이었다.
한은은 지난해 3월 코로나19 여파가 본격 확대되자 기준금리를 1.25%에서 0.75%로 한 번에 0.50%포인트 인하하는 빅 컷을 단행했다. 우리나라의 기준금리가 0%대까지 떨어진 건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어 한은이 같은 해 5월에도 0.25%포인트의 추가 인하를 결정하면서 현재 기준금리는 0.50%로 역대 최저치를 다시 한 번 경신한 상태다.
하지만 적극적인 통화정책에도 불구하고 실물경제의 활력은 좀처럼 되살아나지 않고 있다. 한은이 예상한 우리나라의 올해 경제성장률은 -1.1%다. 이전까지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0%대 내지 마이너스를 기록했던 경험은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0.8%)과 외환위기 국면이었던 1998년(-5.5%), 2차 오일쇼크가 있었던 1980년(-1.7%)뿐이었다. 소비심리도 꽁꽁 얼어붙었다. 지난해 11월까지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기 대비 0.5%에 그치며, 전년(0.4%)에 이어 0%대 저물가에 머물 가능성이 커졌다.
이는 결국 새롭게 풀린 수백조원의 자금이 기대했던 경기 회복 효과를 전혀 내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 대신 이런 유동성을 빨아들이고 있는 곳은 부동산과 주식 시장이다. 영혼까지 끌어 모아 집을 산다는 영끌, 그리고 빚을 내 투자하는 빚투 열풍의 그림자다.
가계가 동원한 부채가 향한 곳은 우선 부동산 시장이다. 정부의 잇따른 정책 실패로 집값과 전셋값이 치솟자 이를 따라잡기 위해 빚을 내고, 이로 인해 부동산 시장이 더 들썩거리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형국이다. 한은의 소비자동향조사에 따르면 지난 달 주택가격전망 소비자동향지수는 132로, 2013년 1월 관련 조사가 시작된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 지수가 100보다 클수록 현재와 비교해 1년 후 주택가격이 오를 것으로 응답한 가구 수가 하락할 것으로 응답한 가구 수보다 많다는 의미다.
과도한 부동산 자산 쏠림 현상은 이전부터 우리 경제 구조의 문제로 꼽혀 온 부분이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동산 자산 배율은 2019년 말 기준 7.4배에 달했다. 2018년 미국이 2.4배, 영국이 4.4배, 일본이 4.9배 프랑스가 5.6배 등에 그친 것과 비교하면 눈에 띄게 높은 수준이다.
경제 전반뿐 아니라 가계만 놓고 봐도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다. 통계청·금융감독원·한은이 발표한 2020년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3월 말 가구별 평균 자산 4억4543만원 가운데 실물자산은 전년 대비 4.3% 증가한 3억4039만원이었다. 이는 부동산 중 거주주택 가치가 5.6% 증가한 영향이 컸다. 현재 가계 자산에서 부동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이보다 더 확대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통계 집계 시점인 지난해 3월 말 이후 지금까지 훨씬 더 뛰어오른 집값과 전셋값을 고려해야하기 때문이다.
부동산과 더불어 증시도 불어난 유동성을 대거 흡수했다. 최근 1년 동안 개미 투자자들이 증시에 투입한 돈은 100조원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우선 이들이 주식을 사기 위해 증권사 계좌에 넣어둔 투자자 예탁금은 지난해 27조3933억원에서 65조6234억원으로 139.6%(38조2301억원) 급증했다. 개인은 지난해 유가증권시장에서 47조4902억원, 코스닥시장에서 16조3156억원 등 총 63조8058억원 어치에 달하는 주식을 순매수했다. 이처럼 늘어난 예탁금과 개인 순매수액을 합치면 지난해 증시로 유입된 개인 자금은 101조9327억원에 이른다는 계산이다.
문제는 이런 유동성 파티 뒤에서 가계 빚은 둘러싼 경고음이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울리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3분기 말 우리나라의 명목 GDP 대비 가계신용 비율은 101.1%로, 통계 작성 이후 처음으로 100%를 돌파했다. 가계신용은 가계가 각종 금융기관에서 받은 대출과 결제 전 카드 사용금액을 합친 통계다. 가계 부채를 포괄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로 통한다.
같은 시점 국제금융협회가 세계 34개국을 대상으로 분석해 발표한 글로벌 부채 모니터 보고서에 따르면, 이 같은 우리나라의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레바논(116.4%)에 이어 조사 대상국 중 2위였다. 다만 레바논의 경우 지난해 8월 항구 폭발 사고로 GDP가 급감한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최고로 평가된다. 또 세계 평균(65.3%)보다는 35.8%포인트나 높은 수치다.
이처럼 개인이 빚을 바탕으로 자산을 닥치는 대로 사들이면서 불거지고 있는 자산 인플레이션 현상에 금융권에서는 민스키 모멘트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민스키 모멘트는 누적된 부채가 임계점을 지나면서 자산 가치 붕괴와 경제 위기로 분출하는 순간을 일컫는다. 빚을 지나치게 끌어다 쓴 투자자들이 경기 둔화로 빚을 갚기 위해 자산을 투매하면서 자산 폭락과 금융위기가 빚어지는 시점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최근의 자산 인플레는 실물경제의 성장이 동반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거품의 성격이 강하다"며 "향후 코로나19가 통제되고 통화정책이 정상화 국면에 접어들 경우 과도하게 불어난 유동성이 급격하게 꺼지며 더 큰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만큼, 이제는 정부와 금융권 모두 장기적 안목에서 연착륙 정책을 마련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