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당 강세 아칸소 주지사 클린턴
탈이념과 협치로 백악관 입성했듯
여의도가 元 가능성 앞서 캐치했나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아칸소 출신이다. 공화당 절대 강세 지역인 아칸소에서 주지사 3선을 달성하는 등 정치력을 한껏 발휘하고 있었지만, 전국적으로는 무명에 가까웠다. 그런 클린턴을 1992년 미국 대선판으로 끌어낸 것은 워싱턴 DC의 민주당 의원들이었다.
1992년 미국 대선은 당초 민주당에는 절망적인 대선으로 여겨졌다. 1988년 당선된 공화당의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이 걸프전을 승리로 이끈데다, 임기 중에 동구권과 소련이 차례로 무너지면서 냉전이 결국 미국의 승리로 종식됐기 때문이다. 미국 대선은 원래 재선에 도전하는 현역 대통령이 유리한데 이러한 성과까지 거뒀으니 민주당이 이길 길은 없어보였다.
1990년에 아칸소 주지사로 세 번째 당선된 클린턴이 "주지사 임기를 마치겠다"며 대선 출마와 거리를 뒀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민주당 원내총무였던 조지 미첼을 비롯해 제이 록펠러·밥 그레이엄·해리스 워포드 등 많은 연방상원의원들이 나서 "당신이 지금 우리 당에서 부시에게 가장 위협적인 후보"라며 클린턴의 출마를 설득했다.
결국 클린턴은 탈냉전·탈이념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기념비적인 선거 슬로건과 함께 대선에서 승리를 거두고 백악관으로 입성했다.
워싱턴 정치가 아칸소의 클린턴을 대선판으로 끌어냈던 것처럼, 여의도 정치가 원희룡 제주도지사를 견인하고 있다. 지난 7일 원희룡 지사를 지지하는 국민의힘 현역 의원들의 모임 '희망오름'에 34명의 의원이 가담했다. 국민의힘 의석의 3분의 1에 달한다. 57명 국민의힘 초선 의원 중 과반인 31명이 원 지사에게 힘을 실었다.
정작 원희룡 지사의 차기 대권 지지율은 아직 미미한 수준이다. 데일리안이 알앤써치에 의뢰해 지난 5월 24~25일 이틀간 차기 정치지도자 적합도를 설문한 결과에 따르면, 원 지사의 지지율은 0.8%에 머물렀다. 여론조사와 관련해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0.8% 대권주자에게 당 의원 34명이 힘을 실은 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여의도 정치가 '실용'과 '협치'의 정치인인 원희룡 지사의 가능성을 앞서서 포착한 것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원희룡 지사는 1982년 서울법대에 수석 입학했다. 순탄한 성공의 길이 보장돼 있었지만 신군부 독재에 항거해 10년 가까이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이러한 원 지사의 인생 행로를 되돌린 것은 동구권과 소련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였다. 아칸소의 '돌아온 꼬마' 클린턴이 백악관에 입성하던 그 해에, 원 지사는 사법시험을 수석으로 합격하고 이후 검사와 변호사를 거쳐 정계에 입문했다.
일찌감치 탈이념 시대의 개막으로부터 충격을 받고 정계 입문 이후 중도·개혁·실용의 노선을 걸어온 원희룡 지사는 현 정권의 정치적 대척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현 정권이 초래한 정책적 파탄의 바탕에는 친문 86 운동권 세력의 이념적 경직성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클린턴이 공화당 절대 강세 지역인 아칸소에서 3선 주지사를 한 것처럼 원희룡 지사도 상대 정당의 절대 강세 속에서 재선 도정을 이끌었다. 2014년 원 지사가 도정을 맡기 시작한 이래, 3석 제주도에서 한 번도 자신과 같은 정당 소속의 국회의원이 나온 적이 없다. 도의회도 절대 열세였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원 지사는 협치를 통해 도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22년 3·9 대선에서 정권교체가 이뤄지더라도 국회는 2024년 총선 때까지 현재의 의석 구도를 유지한다. 새 대통령은 사상 유례없는 '슈퍼 야당'을 맞닥뜨려야할 수도 있다. 여의도 정치권이 원 지사의 협치 도정 경험에 주목하게 되는 배경이다.
원희룡 지사의 정치적 연고지가 50만 인구에 불과한 제주인 점을 한계로 꼽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많은 미국인들이 철자(Arkansas)를 보고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는 아칸소 출신 클린턴도 백악관에 입성했다. '희망오름' 출범으로 여의도 정치가 원희룡 지사를 본격 견인하는 모습에서, 그의 향후 대권 행보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