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고 한다. 국제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은 남북전쟁 이후 적극적으로 대외정책을 추진했다. 이때 핵심은 현지 국가, 혹은 세력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였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협상보다는 무력으로 현지 세력을 굴복시키고자 했다.
1867년 3월 12일 미국 상선 한 척이 타이완 인근에서 암초에 부딪혀 좌초했다. 이 배의 이름은 로버호였고, 중국 광둥 산터우에서 다롄 잉커우로 가던 중이었다. 당시 배에는 선장과 선장의 아내, 그리고 선원까지 총 24명(일부 기록에서는 14명)이 타고 있었다. 배는 결국 침몰했지만, 선장을 비롯해 선원은 전부 타이완 해안에 무사히 상륙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들이 타이완 원주민과 만난 이후에 벌어졌다.
당시 그 일대 타이완 원주민은 서양인에 대해 매우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었다. 이후 밝혀진 바에 의하면 그 직전에 유럽인이 부족민을 살해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에 대한 보복을 결심하고 있는 터였다. 그때 로버호에서 탈출한 선장 부부와 선원이 해안에 상륙한 것이다. 결국 중국인 선원 1명을 제외하고는 전원 타이완 원주민에게 살해당했다.
중국인 선원 1명은 마침 인근을 지나고 있던 영국 군함에 의해 구출되었다. 영국군은 생존자를 구출하기 위해 원주민과 협상했다. 몸값을 지불하겠다고 제안했는데도 불구하고 협상은 결국 결렬되었고, 영국 해군은 선원을 구출하기 위해 원주민을 상대로 무력시위를 했다. 하지만 영국 해군의 무력시위는 원주민이 밀림 안으로 몸을 숨기면서 실패했다. 밀림 안까지 군대를 파견할 수 있는 능력이 영국 해군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영국군은 생존자 구출을 포기하고 중국 아모이로 철수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미 해군에게 전달했다.
미국 동인도 함대 사령관인 헨리 벨(Henry H. Bell) 제독은 일본 요코하마에서 이 소식을 듣고, 페비거(Febiger)가 지휘하는 군함 한 척을 현지에 파견했다. 벨 제독은 페비거 함장에게 현지의 중국 관리와 연락하여 관련 내용을 철저히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페비거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타이완에 도착한 뒤 관련 내용 조사를 위해 지역 중국 관리에게 연락했지만, 중국 관리는 해당 지역은 청 정부의 통치 범위 밖이라 협조가 어렵다고 답변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페비거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 미 영사까지 나서서 해당 타이완 원주민과 접촉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타이완 원주민을 상대로 한 외교적 노력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타이완 원주민은 미국인을 비롯한 서양인에 대해 계속 적대적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결국 언론에서 이에 대한 비난이 이어지자 벨 제독은 동인도 함대를 이끌고 타이완으로 향했다. 미 서부에서 중국까지 정기 항로가 개통되자, 이러한 비난은 수위를 높였다. 기상 조건 등에 따라 언제든지 조난 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적대적 세력의 존재는 위험을 가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표류한 미 함선은 언제든 구출되기 이전에 적대적인 원주민에 의해 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벨 제독은 더 이상 외교적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무력시위, 즉 보복을 통해 원주민을 굴복시켜 미국의 요구를 관철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미 동인도 함대는 1867년 6월 13일 타이완 남쪽 해안에 도착하여 정박했다. 이때 벨 제독은 타이완 전사로 보이는 이들이 공터에 모여 있는 모습을 보고 공격을 지시했다. 당시 미 해군의 보고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붉은색으로 칠한’ 타이완 전사라고 했지만, 이들이 실제 전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당시 미 해군에게는 이들이 전투원인지 비전투원인지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군의 목적 자체가 타이완 원주민에 대한 군사 행동을 통해 로버호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위협을 가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벨 제독은 조지 벨크냅(George E. Belknap) 사령관(하트포드의함장)이 지휘하는 181명의 군인을 타이완 해변에 상륙시켜 타이완 전사로 추정되는 이들을 추격했다. 타이완 원주민이 내륙 밀림으로 몸을 숨기자 미 상륙부대는 부대를 나누어 계속 추격했다. 울창한 정글 속을 1시간가량 추격했을 때 매복해 있던 원주민이 공격했다.
원주민의 공격에 피해를 보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정글이었다. 타이완 원주민은 미군을 피해 계속해서 밀림 속으로 숨었고, 미군은 이들을 찾아 밀림을 헤매고 다녔다. 결국 6시간 정도 추격했을 때 많은 미군이 일사병 등으로 더 이상 공격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미군이 공격을 멈출 때마다 타이완 원주민의 반격이 이어졌다. 마침내 원주민의 공격에 메켄지 중령까지 쓰러지는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미군은 공격이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타이완 원주민과 미 해군의 목적은 동일했다. 원주민은 보복을 통해 자신들의 영역에 더 이상 서구인이 오지 않기를 바랐고, 미국 역시 보복을 통해 항로상의 안전을 확보하고자 했다. 하지만 힘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이것은 비단 원주민뿐만 아니라 미국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무력 보복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이해와 협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