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 심사보고서, 기업 결합 조건으로 슬롯 반납 구체적 제시
황금알 낳는 고수익 장거리 노선 반납 불가피...M&A 효과 반감
의견서 내용 고민 속 정기 인사도 미뤄져…커지는 우려 목소리
최근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아시아나항공과의 기업결합 심사보고서를 받아든 대한항공의 고심이 깊어지는 분위기다.
공정위가 지난해 말 양사간 인수합병(M&A)에 대해 운수권 재분배와 슬롯 반납 등을 전제로 한 조건부 승인 방침을 밝혔던 터라 심사보고서에도 같은 내용이 담겼을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의견서 제출 마감 시한이 다가오고 있다.
13일 항공업계에 따르면 대한항공은 오는 21일까지 공정위 기업결합 심사보고서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할 계획이다. 공정위는 의견서를 전달받은 뒤 이달 말 전원회의를 개최하고 양사간 기업 결합을 심의해 승인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공정위의 심사보고서에는 양대 항공사를 대상으로 한 운수권 재분배와 슬롯 반납에 관한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운수권은 다른 나라 공항에서 항공사가 운항할 수 있는 권리로 정부가 운항횟수와 운항기종 등 일정 기준에 따라 배분한다. 슬롯(slot)은 항공사가 공항에서 특정 시간대에 항공기를 운항할 수 있도록 배정된 시간을 말한다.
공정위는 국내 두 대형 항공사간 합으로 인한 독과점과 경쟁 제한성(시장 경쟁이 제한)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며 합병 후 점유율(국내 기준)이 100%에 달하는 노선에서 일부 슬롯 반납을 제시해 왔다.
대부분 미주와 유럽 지역의 장거리 노선들로 심사보고서에서는 이들 노선들 중 반납이 필요한 슬롯 수 등 구체적인 내용이 담겼을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심사보고서를 받아은 대한항공으로서는 고민이 깊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공정위가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이자니 당초 기대했던 M&A 효과가 반감될 수 밖에 없는데 받아들이지 않으면 M&A가 아예 무산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특히 슬롯 조정을 요구한 노선들이 수익성이 높고 장기적으로도 효용 가치가 높은 장거리 노선이라는 점에서 더욱 고민은 깊을 수 밖에 없다. 또 당초 양사간 M&A로 인한 인위적인 구조조정이 없을 것이라고 밝힌 상황에서 노선 축소는 효율적인 인력 운용을 저해할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러한 고민을 반영하듯 12일 단행된 한진그룹의 정기 임원인사에서 대한항공은 제외됐다. 한진그룹 인사가 해를 넘겨 이뤄졌음에도 대한항공은 포함되지 못한 것이다. 그룹측은 아시아나항공과의 기업결합심사 진행 경과에 따라 추후 실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기업결합심사 승인이 이뤄진 후에 인사가 단행될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승인 조건이 인사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공정위의 최종 승인 조건이 인사 폭과 규모에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며 “일단 인사가 미뤄져 올해 경영 및 사업 계획 수립에도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사간 합병 승인의 최종 조건에 이목이 쏠리는 가운데 당초 기대했던 메가 캐리어(Mega Carrier·초대형 항공사) 출범으로 인한 국내 항공산업 경쟁력 향상이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는 업계의 우려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항공산업이 대표적인 네트워크 산업으로 운수권 및 슬롯이라는 자산의 확보가 경쟁력을 나타내는 척도인데 이를 줄이는 것은 경쟁력을 스스로 약화시키는 우를 범하는 것이라는 게 항공업계의 판단이다.
특히 공정위의 지적대로 경쟁제한성 해소를 위해 양 대형 항공사의 점유율이 높은 장거리 노선의 운수권 및 슬롯을 회수하더라도 이를 수용할 국내 항공사들이 없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저비용항공사(LCC)의 경우, 현재 중·단거리용만 보유한 기재의 한계뿐만 아니라 추가 기재 도입이 이뤄져도 운항 노하우 측면에서 단기간 내 이를 커버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결국 양 대형 항공사의 운수권 및 슬롯 회수의 혜택은 외국 대형 항공사에게로 돌아가면서 국가 항공산업 경쟁력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허희영 한국항공대 경영학부 교수는 “공정위가 국내 시장 경쟁 제한 해소를 내세우는 것은 글로벌 경쟁 체제가 불가피한 항공산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라며 “지난 2년간 코로나19로 위기를 맞은 국내 항공산업의 재도약을 꾀해야 하는 시점에 스스로 발목을 잡는 상황이 아쉬울 따름”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