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못 지킨 문 대통령이 문제지
업적 빼앗기는 게 싫다는 뜻인가
위선과 오만으로 패배했으면서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 국방부 청사로 옮기는 방안이 최종 결정됐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20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국금융연수원 별관에 마련된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이를 설명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윤 당선인은 “국민들께 불편을 드리는 측면, 청와대를 온전히 국민께 개방하여 돌려드리는 측면을 고려하면 용산 국방부 청사 이전 결정을 신속히 내리고 추진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어려운 일이지만, 국가의 미래를 위해 내린 결단이다. 단순한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제대로 일하기 위한 각오와 국민과의 약속을 실천하고자 하는 저의 의지를 헤아려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린다”는 말도 했다.
약속 못 지킨 문 대통령이 문제지
이미 대선 기간에 거듭 공약했던 일이다. 진심으로 한 약속이었다면 당연히 지켜야 한다. 물론 당선됐다고 해서 자신의 공약사항을 실천하고 시행할 권리를 획득한 것이라 여겨서는 곤란하다. 그 공약이 타당성을 가진 것인지, 국가적·국민적 부담을 안기는 것은 아닌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서 실천 여부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오래전부터 여야 정치권과 국민이 참여하는 ‘공약 타당성 검증 위원회’ 같은 기구의 설치를, 칼럼을 통해 제안했었지만 메아리조차 없다).
대통령집무실 이전은 어떤 관점에서 보든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윤 당선인은 “청와대를 국민께 돌려드리겠다는 공약을 말했고, 많은 국민께서 좋게 생각하고 지지를 보내셨다”고 이전 배경을 직접 설명했다. 물론 국민이 그걸 돌려달라고 요구한 적은 없다. ‘국립공원’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대통령이 그 웅장한 대궐에서 나와 국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정치사적 당위다.
아니나 다를까 더불어민주당 사람들은 불에 데기라도 한 듯 일제히 비난을 쏟아냈다.
고용진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이날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윤석열 당선인은 청와대 졸속 추진이 낳을 혼선과 부작용에 대해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공격했다. 그는 “국가적으로 중차대한 사안을 아무런 국민적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게 맞느냐. 윤 당선자는 제왕적 권력을 내려놓겠다는데, 이것이야말로 제왕적 행태가 아닌지 묻고 싶다”고 트집을 잡았다.
누구의 말인지는 고 대변인도 잘 알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호기롭게 한 다짐이다. 문 대통령의 취임사는 이렇게 이어진다.
업적 빼앗기는 게 싫다는 뜻인가
고 대변인, 이 말을 잊었다고는 못할 것이다. 문 대통령은 약속을 못 지켰다(안 지키겠다는 생각이야 했겠는가). 그는 광화문 정부청사로 집무실을 옮기겠다며 위원회까지 구성했었다. 당시엔 국민적 협의를 거쳤었는가? 그 때는 졸속 추진이 아니고 충분히 준비한 다음이었는가? 졸속이 아니었는데 왜 문 대통령은 경호, 국가위기관리센터 상황실, 헬기장 등의 문제를 들어 이전을 포기했는가? 그런 것들이 문제가 될 줄을 몰랐던 것인가?
문 대통령은 ‘광화문 대통령 공약 기획위원회’ 출범식에서 “불통의 시대를 끝내고 국민과 소통하고 함께하는 민주주의 시대를 열겠다는 의지”이며 “참모들과 같은 공간에서 일하며 언제나 소통하는 동시에 상처받은 국민을 치유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약속”이라고 말했다. 스스로 흥에 겨워서 한 말을 깡그리 삼켜버렸다. 그러고는 청와대에 눌러 앉았다(용산 이전을 너무 서두른다는 일각의 지적에 윤 당선인이 “일단 청와대 경내로 들어가면 제왕적 권력의 상징인 청와대를 벗어나는 것이 더욱 어려워 질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게 이 때문일 수도 있겠다).
윤 당선인이 청와대 집무실과 비서동 사이가 멀다는 점을 지적한 데 대해 탁현민 대통령 의전비서관은 17일 페이스북에서 “대통령 집무실을 비서동으로 옮긴지 5년이 됐다”는 말로 되받았다.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본관 집무실이 문 대통령의 전용공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비서들과는 가까워졌겠지만 불통의 시대를 끝내기엔 어림없는 미봉책이었다.
탁 비서관은 또 “제가 조금 전에 (집무실에서 비서동 사이의) 이동 시간을 확인했는데 뛰어가면 30초, 걸어가면 57초로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됩니다. 헉헉”이라고 이죽거렸다. 이것이 문 대통령 비서관의 수준이다. “너무 멀어서 숨이 가쁘네요”라는 비틀기이겠는데 SNS에 취하면 품위 같은 건 잊어버리게 되는 모양이다. 청와대 비서관이면 꽤 높은 자리일 텐데.
윤호중 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의 말은 더 구차스럽다. 그는 같은 날 기자간담회를 열고 “졸속과 날림의 집무실 이전 계획을 즉각 철회해야 한다”고 윽박질렀다. 그는 “용산 집무실 이전 결정 과정이 완전한 졸속, 불통”이라며 “국민의 뜻은 깡그리 무시한 당선인의 횡포”라고 몰아세웠다.
위선과 오만으로 패배했으면서
역시 윤 위원장의 주장이다.
민주당 관계자들이 자꾸 ‘졸속’이라고 하니까 말인데,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던 문 대통령은 그간 뭘 했는지 의아하다. 자신이 성사시키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게 꼭 필요한 일이라고 여겼다면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방안을 찾는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다. 그게 정치발전을 위한 대통령으로서의 책무였을 터이다. “내가 못 나가면 그만이지, 후임자들이 어떻게 하든 그건 그 사람들의 문제일 뿐”이라는 심사였다는 것인가.
안보에 커다란 구멍이 생길 것이라는 말도 너무 호들갑스럽다. 국방부 청사를 옆 건물로 옮긴다고 커다란 구멍이 날 것이라면 문 정권의 안보태세가 그만큼 허술했다는 말이 된다. 누워서 침 뱉기도 정도껏 할 일이다.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예사로 자신들의 흠을 헤집어내는지 신기하기까지 하다.
윤 위원장의 경우, 일전엔 용산을 가리켜 ‘오욕의 역사가 있는 곳’이라는 극언까지 했다. 용산 주민은 말할 것도 없고 온 국민과 국가에 대한 모독이다. 한때는 짓밟히고 빼앗기기까지 했던 그 땅에서 우리는 세계의 선진국가 대한민국을 이뤘다. 긍지를 오욕으로 비트는 그 심사가 어디서 비롯됐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민주당은 정권을 쥔 초거대 정당이다. 이런 조건으로도 대선에서 패배했다. 지려야 질 수 없는 싸움에서 진 것이다. 0.73%포인트의 패배였을 뿐이지만 정권 차원에선 참패였다. 위선과 오만이 패인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고 본다. 혹독한 자기반성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무엇보다 진실과 겸손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민주당은 여전히 덩치자랑이다. 상대를 을러대는 품이 여전하다.
멋있는 패자로 국민들에게 인식되려면 경쟁 상대에게 축하와 찬사부터 보낼 일이다. 자기들이 못 이룬 구상을 상대측에서 실천하겠다고 하는 데 대해서는 마땅히 도움을 줘야 한다. 대통령의 구중궁궐 탈출의 공적을 경쟁자들에게 빼앗기게 된 것이 속상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당위의 과제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면 치졸한 할퀴기는 멈춰야 옳다. 덩치에 걸맞지 않게 오뉴월 무논의 개구리처럼 소리만 질러대면 민심은 더 멀리 떠나버린다.
궁궐을 떠나 국민 속으로! 윤 당선인의 결단에 박수를 보낸다.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