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펜서’
올해는 다이애나 스펜서의 25주기가 되는 해다. 1997년 8월 다이애나가 타고 있던 차량이 파파라치를 피하려고 속도를 내다가 파리의 에펠탑 인근 터널에서 사고를 냈다. 그의 나이 서른여섯으로 찰스 황태자와 오랜 불화를 겪고 15년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지 1년 만이었다. 활발한 봉사활동을 통해 소탈하고 따뜻한 성품을 보인 그의 죽음의 충격과 파장은 엄청났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사진이 찍혔던 여성으로 기록되고 있는 다이애나는 그 어떤 스타나 정치인보다 더 많은 대중의 관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최근 개봉한 영화 ‘스펜서’는 비운의 삶을 살다 간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이야기다.
크리스마스이브가 되면 영국 왕가는 사흘간 성탄을 보내기 위해 별장에 모인다. 왕세자비 다이애나(크리스틴 스튜어트 분)는 아무런 경호 없이 홀로 운전하다 길을 잃고, 남들보다 늦게 도착해 규율을 강조하는 그레고리 소령(티머시 스폴 분)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받는다. 그러나 다이애나는 드레서 매기(샐리 호킨스 분)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동시에 자신의 연약함을 매만져주는 두 아들 윌리엄과 해리에게 의지하면서 고통스러운 휴가를 보낸다. 영화는 왕실의 전통에 따라 휴가를 보내는 3일간의 시간을 담는다.
자신의 정체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스펜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이야기다. 영화는 다이애나가 이혼을 결정하고 별거하기 직전인 1991년을 배경으로 다이애나가 영국 왕실에 속한 한 사람이 아닌 독립된 주체로 보여준다. 영화의 제목 또한 그가 결혼하기 전에 불렸던 이름이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다이애나는 길을 잃고 “Where am I”라고 말하는데 단순히 길을 잃었기도 하지만 이는 자신의 삶에 대한 총체적인 물음이기도 하다. 이내 그는 벌판에 서 있던 허수아비를 발견하고 아버지가 입었던 외투와 자신의 옷과 바꾸면서 스펜서로 살고 싶어 했던 그녀의 마음을 드러낸다. 영화는 규칙과 규율에 얽매여 자신보다 전통을 따라야 했던 스펜서가 자신의 삶을 찾게 되는 과정을 담는다.
자유로운 영혼만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 아무리 부와 명예가 많다고 한들 영혼이 자유롭지 못한다면 삶의 의미를 찾기 힘들다. 다이애나의 삶은 부족함이 없어 보이지만 외로움과 고독으로 가득 차 있다. 샤넬 드레스를 입고 변기를 부여잡고 구토를 하는 모습보다도 스펜서라는 이름으로 KFC 치킨을 주문해 길거리에서 두 아들과 먹는 모습이 훨씬 더 자유롭게 보인다. 인간이 자유를 느끼지 못하면 삶은 고통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발군의 연기력과 연출을 통해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특정 공간을 배경으로 인물의 황폐한 내면을 여행하며 특별히 무서운 장면이 연출된 것은 아니지만 시종일관 긴장감을 자극한다. 신경을 자극하는 음악과 아름답지만 음울한 기운을 풍기는 미술, 여기에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마치 다이애나가 환생한 듯 혼신의 연기를 펼친다. 특히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로 인한 거식증과 폭식증 등 자기 파괴적 행동을 겪는 모습과 불안한 심리를 재현하는 내밀한 연기는 완벽하다.
우리는 그동안 급속한 성장을 이루면서 과거에 비해 경제적으로 잘살게 됐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만큼 행복해 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안한 미래와 경제적 불평등으로 스트레스가 늘어나고 있다. 이는 자살률이 OECD 1위라는 통계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인간의 행복은 경제적 부(富)보다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 영화 ‘스펜서’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영국의 왕세자비가 된 다이애나 스펜서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마음의 행복과 자신의 정체성이 중요함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양경미 / 연세대 겸임교수, 영화평론가film102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