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찍히면 이 바닥 떠야 한다'...권력 쥔 거장들에 압박감 커
"관계 부처의 근본적 개혁안, 폭로자 보호에 대한 고민 필요"
“꿈을 안고 이제 막 연극을 시작했을 무렵, 첫 회식자리에서 극단 대표와 그의 배우자, 연기 선생님 등 3명에게 상습 권력형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지난달 29일, 피해자 A씨는 기자회견을 통해 광주 극단 2곳의 대표와 연출가 등 3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성폭력 의혹이 제기되자 광주연극협회에서 뒤늦게 실태 조사에 나서면서 총 6건의 추가 피해 사례도 접수됐다. 4년 전, 연극계를 휩쓸었던 ‘미투’ 운동이 다시 점화되고 있는 모양새다.
연극·화가·작가 등 광주의 여성 예술인 162명은 ‘광주 연극계 권력형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를 지지하고 가해자 엄벌 및 재발방지책 마련을 촉구하는 모임을 결성했다. 이들은 “성폭력을 예술적 자유이자 특권으로 포장해왔던 연극계 권력자를 예술계는 오랫동안 은폐해왔다”며 “내부고발을 적대시하고, 불온하다고 치부하는 도덕적 불감증이 생존자의 미래마저 암흑 속으로 처박았다”고 지적했다.
현재 가해자로 지목된 3인은 광주연극협회에 이어 한국연극협회에서도 제명됐고, 이들 중 한 명이 대표로 있는 극단은 당초 획득했던 대한민국연극제 경연 자격을 박탈당했다. 하지만 연극계는 뿌리부터 바로잡지 않으면 지금까지 지목된 가해자 3명 이외에도, 가해자 수가 더 늘어날 수도 있다는 의견이다.
한국연극협회는 “성폭력 사태는 이유를 불문하고 엄중하게 그 책임을 물을 것”이라며 “우리 연극인은 아직도 위계에 의한 성폭력 사태가 근절되지 않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성평등 실현과 안전한 작업 환경을 만들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덧붙였다.
다만 여전히 연극계의 뿌리 깊은 위계서열에 의한 성폭력을 바로잡긴 힘들다는 말이 나온다. 불과 4~5년 전 연극계 거장으로 불리는 이윤택, 오태석 등이 성추문에 휩싸이면서 관객들은 이들의 작품에 대한 불매 운동을 벌이는 등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고, 업계에선 사실상 영구 제명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이번 광주 성폭력 사건과 같은 일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관계자들은 예술계의 거장들이 갖는 특수성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연극계 관계자는 “연극의 경우 연출가가 배우의 캐스팅 권한부터 공연 전반을 좌우하는 모든 권력을 쥔 형태다. 문제를 제기하는 순간 업계를 떠야하는 압박감이 클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더해 “‘찍히면 이 바닥을 떠야 한다’는 인식은 피해자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침묵하게 한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이번 광주연극협회의 실태조사에서도 피해 사실을 밝히면서 피해자들은 가해자의 신원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다. 소규모 조직의 폐쇄적인 연극계의 특성 탓에 가해자의 신원을 밝히면, 피해자가 특정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 관계자는 “수십년간 뿌리 깊게 박혀 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피해자의 폭로와 주변인의 연대도 중요하지만, 관계 부처의 근본적인 개혁안이 필요하다”면서 “용기 있는 몇몇의 폭로로 이슈가 됐지만 아직도 드러내지 못하는 분들이 절대적 비중을 차지한다. 내부고발자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도 필요한 시점”이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