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고은, 엄지원, 추자현이 나온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 하고 드라마 '작은 아씨들' 시청을 시작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드라마를 보면서 괴물 신인 작가가 탄생했다고 혼자 호들갑을 떨었다. 정서경 작가 작품인 걸 알고 역시! 했다.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여선지 감독 박찬욱과의 공동작업이 아니어선지 '작은 아씨들'은 기존 정서경 작가가 쓴 작품들보다 훨씬 빠르고 뜨겁고 맵다. 정말 이걸 다 감당하고 회수할 수 있을 것인가 싶게 사람과 사건의 인연이 복잡하게 얽히고 진실을 감춘 비밀과 진실을 가늠케 하는 단서들이 즐비하다. 그야말로 자신감 충만.
오랜만에 머리 써서 추리하고 분노와 환희에 마음 쓰며 흥미진진 드라마를 시청했다. 마지막 회까지 시청한 뒤 눈을 감고 만족감을 천천히 음미할 때야 떠올랐다. 아, 유령 난초. 어, 두 갈래 연꼬리 같은 모양에 나무에서 기거하는 난초 꽃을 어디서 봤더라. 영화 '어댑테이션'!
'작은 아씨들'의 유령 난초가 푸른색이고 '어댑테이션'의 유령 난초가 흰색이어서 연관 짓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정서경 작가는 딴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버젓이 유령 난초라고 불리우고 있는데도 범인을 색출하고 결말을 상상하는 것만 해도 벅찼다.
드라마 '작은 아씨들'(연출 김희원, 극본 정서경)의 유령 난초는 베트남에서 가져 왔다. 밀림 한가운데서 꼼짝없이 죽음의 위기에 몰린 참전 군인들을 치료해 주었던 구원의 꽃. 그들은 살아 귀환해 정란회를 조직했고, 한국에서의 인공 배양에 성공했고, 푸른 난초의 명이면 무엇이든 했다. 그것이 남의 생명을 앗는 것이든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것이든.
안 되는 것 없이 다 되는 금력과 맹목적 충성을 이용해 그들은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하는 권력이 됐다. 드라마는 정란회의 힘에 비해 어처구니 없이 가진 것 없고 초라한 세 자매가 어떻게 그들을 해체시키고 무력화하는가를 따라간다.
지난 2003년 개봉한 영화 '어댑테이션'(감독 스파이크 존즈, 각본 찰리 카우프만ㆍ도널드 카우프만)의 유령 난초는 미국 남부 플로리다에서 채취된다. 잡지 '뉴요커'의 기자 수잔 올린(메릴 스트립 분)은 야생 난초 불법 채취범 검거 기사에 흥미를 느껴 플로리다로 가고, 거기서 존 라로쉬(크리스 쿠퍼 분)를 만난다. 아무것도 정해진 답 없이 자유로이 사는 존, 앞니가 몽창 없음에도 자신감 넘치는 존을 주인공으로 소설 '난초 도둑'을 쓴다.
할리우드에서 소설의 영화화가 결정되고, 데뷔작 '존 말코비치 되기'로 천재성을 인정 받은 작가 찰리 카우프만(니콜라스 케이지 분)에게 각색이 맡겨진다. 원작 소설의 영화화, 흔하고 뻔한 방식으로 각색하고 싶지 않은 찰리는 글을 쓸수록 미궁에 빠진다. 마치 '찰리 카우프만 되기' 영화인 듯, 각본ㆍ각색 작가의 고충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찰리가 자괴감에 빠져 자신감 바닥을 기고 있을 때, 인생 실패자 취급 받던 그의 쌍둥이 동생 도널드(니콜라스 케이지 1인 2역)는 시나리오 작법의 정석대로 스릴러 대본을 써서 다크호스로 떠오른다.
찰리는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고 동생이 들었다는 글쓰기 특강도 듣고, 동생 도널드의 도움을 받아 소설의 원작자 수잔을 만나기로 결심한다. 여자 문제에 관해선 유달리 자신감이 결여된 찰리를 대신해 여자에 관해서라면 자부심 넘치는 도널드가 수잔을 만나고. 쌍둥이 형제는 수잔이 소설 '난초 도둑'에 담지 않은, 사건과 관계의 진실이 있음을 직감한다.
형제는 수잔의 고독을 보았고 감춰진 비밀을 느꼈다. 무작정 수잔을 미행하는 쌍둥이, 수잔은 끊었던 인연의 끈을 다시 잇듯 존을 찾아간다. 형제는 수잔과 존의 재회, 그들이 하는 행각을 통해 고독을 순간 잊게 하는 쾌락, 개인적이고도 사회적인 비밀을 감추려는 자들의 잔인무도함에 직면한다.
'작은 아씨들'에서 유령 난초가 지닌 힘은 인간의 생명을 앗을 수 있는 독성에서 출발한다. 독의 칼끝이 나를 향할 수 있음에도, 마치 내게 걸리적거리는 상대만 제거할 수 있다는양 남용한다.
드라마에서 유령 난초의 상징은 남에게는 없고 내게만 있는 희귀성에 근간한다. 그것은 돈일 수도 있고 사회적 파워일 수도 있고 정치적 권력일 수도 있다. 희귀성을 넘어 독점을 욕망한다. 맹목적으로 강요되는 충성심은 군부정권을 연상시키면서 이제 독재를 품을 수 없는 시대임을 일깨운다.
'어댑테이션'에서 유령 난초의 힘은 쾌락을 가능하게 하는 환각성에 기인한다. 고독을 잊게 하는 쾌락을 넘어 내 생명을 위협할 수 있음에도 외로움에 치를 떠는 인간들은 불나방처럼 유령 난초로 만들어진 초록색 가루를 갈망한다.
영화에서 유령 난초의 상징은 넘지 말아야 할 인간의 선에 근본을 둔다. 그것은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일 수도 있고, 생명 존중-살육 불가라는 윤리와 도의일 수도 있다.
'작은 아씨들'에서 원상아(엄지원 분)와 박재상(엄기준 분), 장사평(장광 분)과 조완규(조승연 분)와 장마리(공민정 분) 등은 인간의 선을 넘었다. 진화영(추자현 분)과 최도일(위하준 분), 오인주(김고은 분)와 오인혜(박지후 분)와 박효린(전채은 분)은 선을 넘으려다 돌아왔다. 오인경(남지현 분)과 하종호(강훈 분), 원상우(이민우 분)는 인간의 세상을 지키려 분투했다.
'어댑테이션'에서 수잔과 존은 동기가 무엇이었든 대체불가한 희귀성 쾌락에 빠졌다. 벗어나고자 했으나 그럴수록, 빠져나오려 했던 고독의 수렁보다 더 깊은 늪으로 빠졌다. 찰리와 도널드는 자신을 파먹는 자괴감과 고독에 정면으로 싸움을 걸었다.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 아니 우리 인간에게 '유령 난초'의 힘이 필요할까. 그것에는 진정 치유력이 있는가. 있다 해도 그 힘을 잘 운용할 그릇이 되지 못한다면 영원히 '고스트 오키드'(ghost orchid)로 저 멀리 밀림에 남겨 두는 편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