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가을비 한 번에 내복 한 벌’이라는 말이 있듯이 바람이 강하게 불어 가을 속에 겨울을 맞이한 것 같다. 경북 영천에서 샤인머스캣 포도 농사짓는 사돈의 일손을 돕기 위해 아내와 함께 내려가는 길이다.
충주를 지나는 데 비는 그치고 푸른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 있다. 몇 년 전 끝없이 펼쳐진 몽골 초원에서 보았던 갖가지 모양의 구름이 떠오른다. 커피를 마시며 여행가는 기분으로 여유롭게 고속도로를 달린다.
북영천 나들목에 접어드니 국도 주변의 들판은 포도 특산지답게 온통 비닐하우스로 뒤덮여 파도가 거품을 내 뿜으며 출렁거리는 것 같다. 우리가 도착하자 사돈 내외는 일손을 멈추고 반갑게 뛰어나온다.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환한 웃음으로 격의 없이 맞아 주어 친구 집에 온 것처럼 푸근함이 느껴진다.
사돈은 정년퇴직 후 고향으로 내려가 3년 전 600평에 묘목을 심어 지난해 첫 수확을 한 데 이어 올해는 9천 송이 정도 봉지를 씌웠다고 한다. 그동안 농업기술센터에 다니며 교육을 받고 틈틈이 멘토 과수원에서 도와주며 전문지식을 익혔다. 주변에서 포도 농사를 짓는 고향 선후배들로부터도 많은 도움을 받아 짧은 기간임에도 초보 농사꾼을 벗어난 듯하다. 넥타이를 맨 깔끔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수더분한 작업복을 입은 모습에서 이젠 완전한 농부가 된 것 같았다.
사돈의 포도농원은 한 고랑이 120미터로 여섯 고랑이다. 100미터 달리기 트랙보다 20미터나 더 길게 포도나무가 줄지어 있어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는 까마득해 보인다. 비닐하우스로 덮인 포도 농장에는 커다란 포도송이가 봉지에 씐 채 주렁주렁 달려있다. 송이가 워낙 크고 무겁다 보니 줄기에 축 늘어져 있는 모양새가 버거워 보였다.
이렇게 되기까지 사돈 부부의 노고가 얼마나 컸을까. 포도 알솎기 할 때는 온종일 하여도 반 고랑도 못할 정도로 힘이 들고 더디단다. 서울에 있는 손주가 보고 싶어도 마음대로 올라올 수도 없고 또 왔다가는 금방 내려가야 할 정도로 고생한 보람이 탐스러운 포도송이로 보답 받은 것 같다. 큼직한 포도송이를 보면 힘들게 키운 자식이 금의환향한 것 같은 기분일 것 같았다.
요즈음 포도 농사의 주종을 이루고 있는 샤인머스캣은 씨가 없고 껍질째 먹을 수 있는 데다 맛도 좋아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과일이다. 인기가 좋다 보니 기존에 재배해 오던 포도나무를 뽑고, 샤인머스캣을 새로 심는 농민들이 많이 늘었다고 한다.
포도 농사 현황과 꼭지가 어느 정도 마른 것을 수확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들은 다음 손수레에 상자를 싣고 포도 수확하는 것을 도왔다. 탐스럽게 달린 포도송이를 요리조리 살펴보며 조심스럽게 다루는 모습에 사랑이 듬뿍 배어 있는 것 같다. 잘 익은 포도를 가위로 잘라 포장하여 판매할 때는 곱게 키운 딸을 시집보내는 것처럼 흐뭇할 것 같은 생각이 들 것이다. 대부분의 포도는 따도 될 정도로 익었다. 포도 꼭지 부분이 파란색이어야 싱싱한 상품으로 인정받고 소비자들도 선호하기 때문에 신속히 수확하는 것이 관건이다.
농장이 평소에는 두 분만으로도 감당할 수 있는 규모이지만 수확 철에는 한꺼번에 익는 관계로 친지들이 와서 많이 도와주고 있다. 우리가 내려갔을 때는 수확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지난 주말에는 작은아들 내외가 서울에서 내려와 일하고 갔으며, 우리 부부가 2박 3일 도와주고 가면 또 다가오는 주말에는 인근에 사는 친척들이 오기로 했다고 한다. 농장에는 궁금하기도 하고 포도도 맛볼 겸 친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단다. 워낙 바쁜 철인 데다 일손이 귀하다 보니 친구 모임도 과수원에서 하면서 일손을 도와주기도 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워낙 비싸 소비자들이 맛보기도 쉽지 않았으나 그동안 재배 농가가 꾸준히 증가하여 가격도 많이 내렸다. 소비자들이야 좋겠지만 재배하는 농민들은 걱정스럽기도 할 것이다. 농협에 출하하는 것보다 지인을 통해 주문을 받아 택배로 판매하는 것이 중간단계가 없어 소비자와 농민 모두에게 이익이 되어 선호하는 것 같다. 서울에 있는 아들은 일손을 도와주고 직장 동료들로부터 주문받은 포도를 승합차에 가득 싣고 올라갔단다.
포도를 판매할 때는 2킬로 또는 4킬로 상자에 담아 판매하는데 2킬로 상자는 보통 3∼4송이가 들어간다. 무게가 좀 더 많이 나가는 것은 상관없지만 조금이라도 적으면 안 된다. 손에 들고 돌려가며 잘못된 것이나 흠집은 없는지 세밀히 살펴본다. 또 상자에 넣는 과정에 포도알이 떨어지면 다시 포장해야 하므로 신중해야 한다. 그 모습이 갓난아기를 안고 조심스럽게 다루는 것 같아 보인다. 땀 흘려 직접 기른 사람은 옆에서 거들어주는 사람과는 자세가 달라 보였다.
포도 상자를 트럭에 가득 싣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농협 공판장까지 함께 갔다. 담당자에게 포도를 넘겨 줄 때 ‘서울 가락동 경매시장에 가서 땀 흘린 만큼의 제값을 받아야 할 텐데’하는 소망이 절로 우러나온다. 내 마음이 이럴진대 사돈의 애타는 심정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저온 창고에 저장했다가 가격이 좋을 때 내놓으면 좋으련만 창고를 작게 만들어 그러지 못하는 마음은 또 얼마나 안타까울까?
좀 더 일찍부터 수확을 해야 하는데 일손이 부족하여 미루어지다 초기 수확 시기가 늦어진 것 같았다. 일손돕기를 끝내고 돌아오는데 ‘무수히 매달린 저 포도를 두 분이 언제 다 수확할까’하는 걱정으로 발걸음이 쉬 떨어지지 않았다.
마지막 날 올라오려고 하자 이웃과 나누어 드시라며 샤인머스캣 몇 상자와 가지, 고추, 대추와 같은 농산물을 자동차 트렁크에 가득 실어 주셔서 시골 부모님 댁에 다녀오는 기분이 들었다. 많이 도와드리지도 못하고 오히려 시간 맞춰 우리 식사 챙긴다고 신경 쓰느라 부담만 드린 것이 아닌가 염려스럽기도 하다.
싱싱하고 맛있는 포도를 먹을 때마다 두 분의 땀방울이 배여 있는 푸른 보석을 맛보는 것 같아 숙연해지기도 한다.
퇴직하고 고향에서 농사짓는 것이 힘은 들겠지만,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일터가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고의 상품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갖고 노력하는 모습이 멋져 보인다. 큰 수익을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땀 흘린 대가를 거둘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싱싱한 포도를 먹을 때마다 사돈의 땀방울로 영글어졌다는 생각에 더욱 달콤함이 느껴진다.
조남대 작가 ndcho5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