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을 맞아 오랜만에 우면산에 올랐다. 정상의 소망탑에서 아이스케이크로 땀을 식힌 다음 예술의전당으로 내려왔다. 카페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사서 아내와 함께 야외 탁자에 앉았다. 파라솔 아래 앉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조금은 시끄럽지만, 따사로운 가을 정취가 느껴진다.
한가한 휴식공간에는 여러 사람이 커피를 마시거나 빵을 먹으며 온갖 이야기들을 토해낸다. 바로 옆에는 육십 대 후반의 여자분 셋이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눈다. 좀 다혈질적으로 보이는 여자가 주로 이야기하고 두 사람은 듣는 편이다. 혼자된 다른 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그 친구는 동네 주변 공원을 산책하다 매일 공원에 오는 남자를 만나 차도 마시고, 식사도 같이하는 친구로 지내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상대 남자는 미국에 오래 살았는데 예의도 바르고 또 미남이기도 하단다. 친구는 그 사람을 위해 알뜰하게도 경동시장까지 가서 몸에 좋은 보약을 해 준다며 부러움 반 비난 반 신나게 이야기한다. 옆에 있는 두 명도 맞장구를 치며 재미있게 듣는다.
이야기 소재로는 ‘옆에 없는 사람 이야기하는 것이 제일 재미있다’라는 말이 맞는 모양이다. 남의 말을 엿듣는 것은 좋지 않지만 내가 들어도 귀가 솔깃해진다. 은근히 그 남자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면서 앞에 앉아 있는 아내의 얼굴을 쳐다본다. 아내도 나를 바라보며 의미 있는 웃음을 짓는다. 속마음이 들킨 것 같아서 그냥 웃기만 했다. 남 말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건너편에는 초등학교 3학년쯤 되는 남. 여학생 여덟 명과 그 학생의 엄마들이 앉아 있다. 삼십 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어머니들은 자녀들에게 빵과 과자, 음료수를 잔뜩 챙겨주고는 옆자리에서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눈다. 좀 떨어져 있어 이야기 내용은 들리지 않는다. 손짓해가며 신나게 이야기를 하다 가끔 폭소가 터지기도 하는 것으로 보아 무척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아마 자녀들의 학교생활과 관련한 것이나, 선생님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을까 추측된다. 자녀 교육에 관한 공통화재가 있어 서로가 쉽게 친해지는 것 같다. 아내도 아들 초등학교 친구 엄마들을 30년이 지난 지금도 정기적으로 만나 회포를 풀고 있다
두 시간쯤 지나자 아이들은 시들해졌는지 왔다 갔다 하며 각자 놀고 있는 데도 엄마들의 이야기는 끊어질 줄을 모른다. 모처럼의 휴일을 맞아 시원한 야외에서 또래 여자들과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으니 시간 가는 줄 모를 것이다. 그동안 남편과 자식의 뒷바라지와 집안일로 쌓였던 스트레스를 훌훌 털어버리고, 자녀들의 교육과 관련한 정보를 교환하는 좋은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자녀들과 함께 온 학부모들을 보고 있으니 아들, 딸 키울 때가 떠오른다. 틈만 나면 조그만 자동차에 캠핑 장비를 싣고 늦은 밤에 도착하면 배고프다고 보채는 아들딸에게 3분 짜장으로 허기를 채우고 좁은 텐트 안에서 손수건 돌리기를 하며 놀았던 일이 눈에 선하다. 애들도 참 좋았던지 지금도 그때의 이야기를 한다.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이십 대의 손자 두 명이 휠체어에 할아버지를 태우고 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산책을 나왔다. 커피와 음료를 사 왔지만, 야외 카페에 자리가 없자 나무 옆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한다. 몸이 불편한 할아버지를 위해 훤칠하고 멋지게 생긴 청년 두 명이 휠체어를 밀며 예술의전당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드리는 모습이 참 보기가 좋다.
휴일을 맞아 바쁠 텐데도 할아버지를 위해 시간을 내어 준 늠름한 손자들이 대견스러워 바라보였다. ‘자식 교육을 참 잘 시켰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동행하고 있는 할머니와 어머니를 돌아본다. 교양이 있어 보이고 인자한 분위기가 풍긴다. 요즈음 쉽지 않은 광경을 보아 기분이 좋으면서도 부럽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나도 아내와 함께 손주들을 돌보고 있지만, 나이 들고 아프면 할아버지를 위해 저렇게 해 줄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자식이나 손자는 키울 때 부리는 재롱으로 이미 효도를 다 했다’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내 손주들이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 가을 정취를 느끼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렇게 해 줄 거라는 믿음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해가 국악원 지붕 위로 넘어가려 하자 그 많던 사람들도 하나둘 떠나고 몇몇 사람들만 조용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다. 오늘은 아내와 함께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가을을 가슴으로 느끼며 여러 세대의 다양한 모습을 보았다. 소소하지만 이런 여유를 즐기는 것이 행복이 아닌가 생각된다. 마음은 아직도 청년인데 어느덧 황혼 길에 접어들었다니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하루하루를 보람 있게 사랑하면서 지내는 것이 젊게 사는 비결인 것 같다. 지는 해를 보고 아쉬워하기보다는 석양의 붉은 노을처럼 인생 후반을 불태워 보리라는 생각이 든다.
조남대 작가 ndcho5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