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적 주제의식까지 겸비한 '문제작'의 배우들
배우들은 작품마다 다른 ‘가면’을 꺼내쓴다. 가면이 많이 준비돼 있든 이번에 새로 만들었든, 기존 작품에서와 확연히 다르든 작은 차이뿐이든, 새로운 캐릭터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가면을 꺼내 든다. 그러지 못했을 때 대중은 그 식상에 호감을 지우거나 실망한다.
드라마 ‘퀸메이커’를 볼 때 어느 배우에 관한 기사를 쓸까, 모색하며 시작한 게 사실이다. 이번엔 또 어떤 배우가 작품을 위해, 시청자를 위해 새로운 ‘가면’을 꺼냈을까 궁금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배우 서이숙이었다. 음색과 성량이 좋은 배우인 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은성그룹 회장 손영심을 맡아 사람을 제멋대로 부리다 못해 세상을 호령하는 야망을 지닌 권력가의 카리스마를 이토록 멋지게 표현해내다니! 예상을 훌쩍 넘어서는 배우 서이숙의 스펙트럼과 ‘힘’에 압도됐다. 준비된 배우는 맡아본 적 없는 캐릭터를 맡아도 마치 그렇게 살아온 것처럼 연기할 수 있다는 걸 다시금 깨닫게 하는 명연기였다.
그래, 이 배우야! 마음을 먹은 순간, 또 다른 배우가 눈에 들어왔다.
와! 그냥 입이 떡 벌어졌다. 배우 류수영에게 이런 ‘가면’이 가능하다고? 뽐내지 않지만 연기의 기본기가 잘돼 있는 배우인 줄은 알았으나, 모든 배우가 그러하듯 자신의 결에 맞는 ‘한계’라는 게 있다고 생각했다. 자상한 말투에 요리 잘하는 남자의 얼굴에 악마가 어렸다. 반대되는 성질의 것이 동시에 보여지니 ‘짜릿했다’.
15년 이상 전에 전주국제영화제가 한창인 그곳의 한 선술집에서 우연히 합석한 뒤 중국 근대소설을 놓고 ‘언쟁’을 벌였던 일을 사과할 기회가 없어 늘 찜찜했는데, 무릎을 치게 하는 배우 류수영의 호연을 보노라니 미안한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공부하는 자세가 만들어낸 결과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좋았어, 변화가 말할 수 없이 크니, 배우 ‘발견’에 딱인 걸! 그때쯤 썼어야 했다, 기사를. 그런데 빠져버렸다, 드라마 자체에. 목적의식을 가지고 보기 시작한 드라마였는데, 그냥 즐기게 된 것이다.
물론 그 배경에 여러 요소가 있지만, 배우가 가장 크다. 서이숙, 류수영으로 끝나지 않는 ‘선수’들의 입장이 줄줄이 이어졌다. 독립영화, 저예산영화에서 자주 보던 배우 김새벽의 정돈되지 않아 더 좋은 낯섦을 대작 상업드라마에서 보니 너무 반갑고, 배우 윤지혜의 패기와 ‘똘끼’가 제대로 쓰이니 기분 좋다. 맡는 역마다 믿고 보게 만드는, 보기 드문 강단을 지닌 배우 옥자연은 이번에도 기대 이상에 김선영은 드라마 ‘일타스캔들’에서의 아쉬움을 지우고 본인의 최대 무기인 진정성의 가치를 확인시켰다.
배우 현봉식은 드라마 ‘수리남’에서 하정우 친구를 맛깔나게 해내더니 이번엔 문소리 남편 노릇을 구수하고 듬직하게 표현하며 스타 배우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내공을 과시했다. 대배우 앞에서 주눅 들지 않기는 신인배우 기도훈이나 심영은, 나이 어린 박상훈도 마찬가지다. 굳이 거론할 것도 없이 진경, 이경영, 김태훈은 제 몫을 해냈다.
주연이어서, 드라마의 세계적 인기 속에 어차피 칭찬 많이 받을 것이니 제외한다면 그게 바로 역차별 아닌가 싶을 만큼 ‘퀸메이커’ 황도희 역의 김희애와 ‘퀸’ 오경숙 역의 문소리 역시 너무 잘했다.
배우 김희애는 이름값 하는 연기가 무엇인지 보여줬다. 타이틀롤이지만 결코 퀸보다 우위에 있어 보이거나 퀸으로 보이면 안 되는 상황에서 적정선을 지키며 작품을 이끌었다. 퀸과 퀸메이커가 동등해 보이게, 우정으로 보이게 함으로써 ‘킹메이커’와 다른 ‘퀸메이커’의 면모를 확실히 했다.
배우 문소리는 쉽지 않은 역할과 기능들을 기가 막히게 소화했다. 퀸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므로 드라마 서사의 중심에 서지 않으면서도, 퀸다운 포용과 카리스마를 뿜어내며 드라마 속 세상의 중심에 서야 했다. 퀸으로서의 무게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차갑게 날이 서 있는 황도희 곁에서 따뜻한 인간미와 웃음을 지닌 오경숙으로 시청자의 긴장을 누그러뜨려야 했다.
특히, 인물의 전사가 설명된 바 없어도, 오경숙의 이력이 어땠는가를 시청자가 충분히 느낄 수 있게 작은 장면 장면들에 녹여냈다. 팔을 들어 구호를 외칠 때 팔의 동작 하나, 민중가요를 부를 때 입 모양과 리듬을 타는 몸동작 하나에서 오경숙의 뿌리가 보였다. 민주화운동에 젊은 날을 보내고 양심의 소리에 따라 서민을 위해 살아온, 인권변호사라기보다 힘없는 사람을 위한 변호인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오경숙을 배우 문소리는 은연중 보여 주었다. 덕분에, 중대사건 고비마다 정치적 유불리보다 사람을 택하는 선택이 ‘공중에 붕 떠’ 보이지 않았다. 킹의 선택과 다른 퀸의 선택에 감성으로 설득력을 부여했다.
그렇게 배우들의 명연기에 푹 빠져 드라마 ‘퀸메이커’를 보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가 재미있어서 처음엔 못 느낄 수 있다고 해도 명백히 ‘퀸메이커’는 정치와 사회를 포함해 우리 사회가 내리는 판단과 결단들에 새로운 잣대를 제시하고 있다.
권력을 쥔 남자들의 전형처럼 그 전철을 밟으며 살아온 백재민(류수영 분)-기존 수법대로 모략과 조작의 칼을 들고 전장에 나선 칼 윤(이경영 분) 조는 패배한다. 성별만 여성일 뿐 행태는 기존 권력자와 똑같은 손영심 회장과 3선 국회의원 서민정(진경 분)도 패한다. 불 보듯 뻔하게 불리한 줄 알면서도 사람을 중심에 놓고 선택하는 오경숙-결과중심적 냉혈 전략가였지만 상호존중으로 합을 맞춰 나가며 새로운 길을 선택한 황도희 조는 승리한다.
영화 ‘킹메이커’와 비교하거나 대조시키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드라마 ‘퀸메이커’는 오랜 세월 세상에 나온 수많은 작품에서 하나의 공식처럼 도식화된 ‘남성들이 이끈 이성 우위의 역사’에 여성들의 감성으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역사적 사명을 제기한다.
배우들의 호연에 도전적 주제 의식까지 겸비한 문제작 ‘퀸메이커’, 한달음에 11화를 보고 나서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아, 누구를 써야 하지?
다시금 생각을 배우에 집중해 본다. 문지영 작가가 극본을 쓸 때, 오진석 PD가 연출을 앞두고 그 극본을 읽을 때 ‘1순위’로 생각한 배우들이 전부 캐스팅된 건가 싶을 만큼 출연진의 위용이 쟁쟁하다. 심지어,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열린 생방송 토론의 첫 번째 질문자로 나선 시민이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에서 유관순의 어머니로 나왔던 배우 오지영인 것을 보며 제작진이 참으로 캐스팅에 공을 들였음을 확인하고 나니, 누구를 택해야 할지 더욱 어려웠다.
그래서 이렇게, ‘배우발견’인지 ‘리뷰’인지 모호한, 이도 저도 아닌 기사를 쓰게 되었다는 긴 변명으로 기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끝내는 일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