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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천재들의 인생연기로 묻는 ‘죗값’의 무게 [홍종선의 명장면➁]


입력 2023.12.12 08:46 수정 2023.12.13 18:28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운수 오진 날’, 자식 잃은 부모가 내 자식 죽인 연쇄살인마를 벌하는 방법론 질문

이성민-이정은, 최고의 공감연기로 묵직한 주제의식 표현…유연석 열연도 한몫

이성민과 이정은(오른쪽), 명배우 열전 ‘운수 오진 날’. ⓒ이하 티빙 제공


우리는 배우 이정은과 이성민의 젊은 모습을 알지 못한다. 두 배우가 지닌 연기의 힘 대비 늦게 발견됐고 대중은 벌충하듯, 나오는 작품마다 관심을 기울이고 크게 사랑한다.


티빙 드라마 ‘운수 오진 날’을 보면서 왠지 모를 미안함에 우리가 더 뜨겁게 사랑하는 게 아니었다고 깨닫는다. 이성민과 이정은, 연기 천재 배우들은 숨죽여 갈고 닦은 내공으로 작품마다 ‘인생 연기’를 경신하고 있다.


이정은과 이성민, 인생연기 정점을 새로 쓰다 ⓒ

영화 ‘기생충’에서 이정은을 보며 어떻게 이렇게 잘할 수 있나 감탄하고 ‘내가 죽던 날’과 ‘자산어보’를 보며 더 감탄하고.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보며 놀라고 ‘우리들의 블루스’를 보며 깜짝 놀랄 때, 그 이상이 또 있을 줄 몰랐다.


영화 ‘방황하는 칼날’로 존재감 각인시키고 ‘공작’으로 남우주연상 휩쓴 뒤 ‘목격자’로 원맨쇼하고 ‘대외비’로 몸서리치는 권력의 본질을 내뿜고, 드라마 ‘형사록’의 치열함으로도 모자라 곧바로 ‘재벌집 막내아들’의 제목을 ‘재벌집 왕회장님’으로 바꿔야 하나 싶은 매서움을 보였을 때, 그때가 정점인 줄 알았다.


말이 필요 없는 연기력을 지닌 두 배우의 만남으로도 가슴이 벅찼는데, 최고의 자리에서 더 치고 올라가지 않고 횡보만 해도 대만족인데, 이 연기 장인들의 깊이는 도대체 어디까지인지 다시 새로운 얼굴을 꺼내 우리에게 내민다.


연쇄살인마에게 딸을 잃은 아빠 오택 역의 배우 이성민 ⓒ

새로워서만 감탄한 건 아니다. 이성민은 극적 연기, 정석의 메소드 연기를 하는 배우라고 여겼다. 이정은은 사실적 연기, 21세기식 현대적 일상 연기를 하는 배우라고 생각했다. 좁고 얕은 눈으로, 제멋대로 두 배우를 ‘틀’에 가두고 있었다. ‘운수 오진 날’에서 배우 이정은은 특유의 현실감 넘치는 연기에 극적 표현을 얹었다. 배우 이성민은 본인의 장점인 그냥 인물이 돼버리는 극적 연기를 유지하면서도 힘을 뺀 일상의 호흡을 뱉었다.


감히 진일보했다든가 물이 올랐다는 표현은 삼가겠다. 원래 그런 표현법들을 두루 갖춘 배우들인데 그걸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있는 작품과 캐릭터를 지금 만난 것이다.


연쇄살인마에게 아들을 잃은 엄마 황순규 역의 배우 이정은 ⓒ

‘운수 오진 날’에서 두 배우는 모두, 자식을 잃은 부모가 돼야 했다. 이정은이 맡은 황순규 씨는 아들 남윤호를, 이성민의 오택은 딸 승미를 고통도 공감도 모르는 사이코 연쇄살인마(유연석 분)에게 빼앗겼다.


부모가 돼 본 적이 있든 없든 우리는 직간접적으로 자식을 여읜 부모가 얼마나 고통에 몸부림치고 어디까지 분노할 수 있는지 안다. 그리고 다양한 장르의 수많은 콘텐츠를 통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감행하는 사적 복수를 목격했다.


‘운수 오진 날’이 그저, 연기 지존들의 몸을 빌려 다시금 동어반복으로 ‘복수의 복제’를 거듭했다면, 명배우 낭비였을 것이다. 그간 세상에 나온 관련 콘텐츠들을 출발점으로 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에게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고, 도망갈 퇴로를 막은 채 집요하게 묻는다.


뒷모습만 봐도 나는 네 놈을 알아볼 수 있어! ⓒ

그 민감하고도 중요한 질문을 황순규와 오택의 대조를 통해 묻는다. 화원을 하던 엄마 순규 씨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의 죽음에, 형사 이상의 집요한 성실과 목숨과 맞바꾼 촉으로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그놈’을 추격한다. 마치 사립 탐정처럼 동원할 수 있는 온갖 방법을 거침없이 시도하고 총까지 준비하지만, 목적은 사적 복수에 있지 않다. 공적 사법 체계 내에서 제대로 죗값을 치르게 하려는 게 순규 씨의 판단이다.


딸을 잃고, 아들의 연인과 손주마저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오택 “똑같이 되갚아 주겠다” ⓒ

아빠 오택은 우유부단하고 흐리멍덩한 자신으로 인해 아내와 자식들이 고생하고 있다는 죄책감을 안 그래도 지니고 있는데, 딸의 목숨을 놓고 벌이는 내기에서 연쇄살인마에게 이용당하자 자신을 혐오하기에 이른다. 서울에서 목포까지 택시 기사로 동행 속 흡사 연쇄살인마에게 가스라이팅 당한 듯 ‘받은 대로 되갚아 주겠다’는 사적 복수를 다짐하고 결행한다. 아무런 타협 없이,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살인마의 심장을 향해 직진한다.


어떤 게 아무런 이유 없이 “나는 살인이 운명”이라고 지껄이며 13명을 죽인 연쇄살인마가 받아야 하는, 알맞은 ‘죗값’일까. 순규 씨 판단이 옳을까, 택 씨의 생각이 맞을까.


순규 씨의 부탁 ⓒ사진 출처=네이버 블로그 ruddk20071

드라마에서 두 명배우가 나란히 물가에 누운 장면이 있다. 칼 맞고 물에 빠진 오택을 총 맞은 황순규가 건져 올린 후 말한다.


“만약에 제가 죽고 오 기사님이 살면요, 그놈 죗값 꼭 치르게 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오택은 말이 없다. 답은 드라마 결말에서 행동으로 보여준다. 황순규의 유언은 오택의 선택, 이야기의 결말을 바꾼다. 언제, 어떻게 바뀌는지 예측하기 쉽지 않다. 필감성 감독이 자신감 있게 주제 의식을 7화 초반에 전진 배치한 이유다.


영화 ‘올드보이’ 때보다 한껏 강력해진 (아직은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악마 역의 배우 유연석 ⓒ 이하 티빙 제공

무엇이 옳은지 들어놓고도 보는 이의 마음에 평화가 깃들 수 없게, 계속해서 ‘나의 선택과 판단’을 놓고 갈등하고 고민하고 숙고하도록 ‘운수 오진 날’이 우리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는다. 필 감독이 자신감 있게 결말을 공개하고 달릴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다,


예측이 쉽지 않고, 시청자의 뇌를 계속 움직이게 하는 일이 가능했던 건 인생이 그렇게 간단치 않아서기도 하지만, 드라마가 ‘치밀하게’ 구조화한 상황들이 기막히게 얄궂어서다. 또, 인생의 위기나 강한 상대를 만나면 한 사람의 진가가 드러나듯, 영화 ‘서울의 봄’에서 정우성이 황정민과 부딪히니 얼마나 연기 잘하는 배우인가가 확인되듯, 명배우 이성민과 이정은과 함께하니 유연석의 사이코패스 연기가 작두 탄 듯 춤을 춘다.


치밀, 꼼꼼하고 촘촘한 설계 위에 펼쳐지는 반전! ⓒ

삼천포로 빠져, 치밀함에 대해 덧붙이자면, 4화를 보다가 ‘운수 오진 날’이 몇 부작 드라마인지 확인했다. 4화를 이야기 전개 구조에 비춰 보면 6부작, 길어야 7부작으로 끝나야 하는 단계였다. 그런데 10부작이란다. 눈앞에 보이는 게, 자연스럽게 단정하여 말해지는 게 다가 아니구나! 어디서 반전이 올까, 누구에게서 올 수 있지? 답은 명확했다. 오 기사님일 수도, 황순규 님일 수도 없다. 금혁수!


그때부터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오택과 황순규, 둘 중 누구의 마음에 손을 들어야 할지 고민하는 것만도 버거운데 어떻게 하면 “저는 금혁수예요”라고 말한 자의 얘기들과 피해자들의 생전 주장이 모두 ‘참’이 될 수 있는지 머릿속으로 1화부터 복기하느라 바쁘다. 단지, 당위성 큰 선언을 툭 던지는 드라마가 아니라 스릴러로서 장르적 재미도 가득하다는 얘기다. 더불어, 재미만 우선하지 않고, 주인공이어도 의도가 나쁘지 않았어도 불법에 대해서는 법의 심판을 받는 장면을 잊지 않은 점도 치밀하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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