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진 책임 근거 담은 개정안 시행
핵심인 책무구조도는 가이드라인뿐
회사별 구체적 적용 방안은 '미완성'
"스스로 작성" 시장 자율 명분 '글쎄'
잊을 만하면 터져 나오는 금융사고와 직원 일탈에 대응하기 위해 경영진에게까지 책임을 묻겠다는 이른바 금융판 중대재해처벌법이 공식적으로 첫걸음을 뗐지만, 아직 반쪽짜리 찝찝한 출발이라는 평이 나온다. 관련법의 핵심이자 사고의 책임을 명확하게 적시하는 책무구조도에 대해 이제야 당국의 가이드라인 정도만 나온 상태로, 금융사별 구체적인 적용 방안은 아직 확정된 사례가 없어서다.
더욱이 당국이 시장 자율을 명분으로 책무구조도를 금융사 스스로 작성토록 하면서 업계 내 눈치 보기와 그에 따른 갈등을 조장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4일 금융권에 따르면 전날부터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지배구조법) 개정안이 시행됐다. 개정안은 금융사의 내부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최고 대표이사를 포함한 임원진에게 책임을 지울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 내용이 핵심으로, 일명 금융판 중대법으로 불린다.
그 중에서도 골자는 책무구조도다. 앞으로 금융사들은 임원의 직책별로 책무와 책무의 구체적인 내용을 기술한 문서인 책무기술서와 임원의 직책별 책무를 도식화한 책무체계도를 작성해 이사회 의결일로부터 7영업일 이내에 금융당국에 제출해야 한다.
이는 최근 금융권에 횡령 사고 등이 잇따르고 있는 만큼 내부통제와 관련한 책무를 확실히 정해두겠다는 취지다. 금융위가 마련한 개정 지배구조법령 해설서상에서 책무는 '금융관계법령 등에 따라 금융회사 또는 금융회사 임직원이 준수해야 하는 사항에 대한 내부통제 및 위험관리의 집행 및 운영에 대한 책임'으로 규정돼 있다.
책무는 금융사의 임원, 직원과 책무에 사실상 영향력을 미치는 다른 회사 임원에게도 배분할 수 있다. 내부통제 등의 효과적인 작동을 위해 책무는 해당 책무와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는 임원에게 배분할 필요가 있다고 당국은 강조했다.
특히 대표이사의 어깨가 무거워진다. 대표이사 등은 내부통제 총괄 관리 의무를 부여받고, 관련 조치의 내용과 결과 등을 이사회에 보고해야 한다. 또 대표이사 등은 ▲책무를 배분받는 임원의 변경 ▲책무구조도에서 정하는 임원 직책의 변경 ▲임원 책무의 변경 또는 추가되는 경우 책무구조도를 변경해 당국에 제출해야 한다.
문제는 이를 규정한 지배구조법이 시행됐음에도, 정작 제일 중요한 책무구조도는 실제 모습을 드러낸 사례가 아직 없다는 점이다. 현재 금융당국의 설명은 어디까지나 가이드라인이다. 이런 식으로 책무구조도를 작성해 둬야 한다는 안내로, 앞으로 이를 기반으로 책무구조도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뜻이다.
금융당국은 하위 법령을 마련해 책무구조도 제출 시기를 총 네 단계로 나눴다. 은행과 금융지주사는 법 시행 후 6개월 이내인 내년 1월에 책무구조도를 제출하도록 명시하고, 금융투자·보험사는 자산 5조원을 기준으로 이상일 경우 법 시행 후 1년, 미만일 경우 2년 안에 제출하라는 기준을 정했다. 여전사와 저축은행도 자산 기준에 따라 최대 3년 이내 책무구조도를 제출해야 한다.
금융사가 셀프로 책무구조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도 일각에선 논란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당국은 금융사 스스로 각자의 특성을 고려해 사전에 명확히 하는 책임제란 취지로 책무구조도를 작성토록 했다.
이에 금융권에서는 부담스럽다는 분위기다. 누가 어떤 책무구조도를 내느냐에 따라 경쟁사에도 영향을 줄 수 있어서다. 상대적으로 완화된 수준의 책무구조도를 냈다가는 내부통제가 느슨한 금융사로 비칠 수 있어서다. 이 때문에 금융사들 사이에서는 굳이 먼저 책무구조도를 공개할 필요가 없다는 보신주의적 반응도 나온다.
이를 의식한 듯 금융당국은 당근을 제시하며 책임구조도 제출을 독려하고 나섰다. 법정 기한보다 빨리 책무구조도를 제출한 금융사에게는 금융 사고 발생 시 제재를 면책하겠다는 방침이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책무구조를 조기에 도입해 운영 할 수 있도록 시범 운영 기간을 도입하려고 한다"며 "이 시기에 무조건 빨리 제출해서 당국으로부터 컨설팅을 받고, 수정하고 운영하는 것이 가장 좋은 최선의 방법"이라고 언급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책임구조도를 대하는 금융사의 가장 큰 부담거리는 선례가 없다는 것"이라며 "당국은 금융사 자체 판단의 여지를 열어주며 자율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는 감독당국 앞에서 셀프로 규제를 만들어 보라는 식인 만큼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