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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수집’ 조대영 디렉터가 지키는 비디오테이프의 가치 [사라진 매체, 비디오테이프③]


입력 2024.08.26 07:25 수정 2024.08.26 07:25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20년간 약 5만점의 비디오테이프 수집. 누군가에게 이 이상한 수집 행동이 광주 동구 인문학당 조대영 디렉터에게는 자칫 잘려 나갈 뻔한 ‘한국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보존하는 숭고한 일이다.


광주에서 30년 넘게 영화 운동을 해온 영화인이기도 한, 조 디렉터는 누군가 한국 영화사의 가치 증명과 경쟁력을 위해 누군가는 붙들고 있어야 할 것 같아 비디오테이프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작업은 조 디렉터의 삶의 중요한 과업이 됐다.


그가 모은 비디오테이프들 중 2만 5000점이 2022년 11월부터 2023년 6월까지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에서 개최된 ‘원초적 비디오 본색’ 전시회의 주인공이 됐다. 국내 출시된 비디오테이프를 소개하는 전시는 조대영 디렉터가 문화적 가치를 보전하겠다는 신념의 결과물이었다.


'비디오 원초적 본색'은 비디오의 역사 안에서도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VHS, 그 안에서도 대중적으로 유행했던 왔던 영화에 집중했다. VHS를 날 것 그대로 전시 소재에 사용함으로써 현대에서 느끼기 어려운 '물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큰 카테고리 안에서 소개되는 VHS의 장르별, 지역별 개수, 비디오 케이스의 영화홍보 문구와 관람연령, 군데군데 비디오점에서 붙인 대여료와 대여 기간 등은 당시의 시대적 문화를 보여줬다.


비디오 매체가 새로운 세대들에게 낯설고 더 이상 필요 없는 문물이라 하더라도 넷플릭스, 유튜브 등의 OTT(Over-The-Top)의 기원으로서 문화를 수용하는 방식의 다양함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장이 됐고, 비디오를 경험한 세대에게는 기억을 되살리는 기회가 됐다.


이 전시는 광주에서 열렸음에도 10만 7000명이 다녀가 성황을 이뤘다. 하지만 전시가 끝난 지금은 다시 조대영 디렉터가 먼지가 쌓인 창고에 개인적으로 보관 중이다. 개인이 5만 점의 비디오테이프를 보관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전시해서 많은 사람에게 잘 알려놓고 이벤트성으로만 끝나버렸다는 사실이 지금은 사실 조금 아쉽습니다. 우리 영화사의 30년을 담당했던 비디오테이프를 물성이 있어야만 증명할 수 있잖아요. 이건 분명히 수집하고 연구가 되어야 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해요. 미래의 세대에게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비디오테이프 물성 자체의 질이 안 좋아지고 있어요. 어떤 계기와 만나 넓은 공간으로 세상 밖으로 끌어올려지길 바랍니다. 전 세계에서 드러난 것 중, 개인이 이토록 방대한 양의 비디오테이프를 가지고 있는 사례는 저 하나뿐입니다. 그런데 이걸 저라는 개인이 혼자 담당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지치고 외롭습니다."


한국 영화사의 중요한 핵심을 이론적으로 접해야 하는 후대를 생각하면, 지치고 외롭더라도 포기할 수가 없다.


"비디오테이프는 한국영화 역사의 1980~2000년대 초중반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비디오 판권을 팔고, 그 돈을 끌어다가 비디오 영화를 찍기도 했으니까요. 비디오를 빌려다 본 영화가 당시에는 한국 영화사 순환에 버팀목 중 하나가 됐던 거죠. 지금 넷플릭스나 디즈니플러스가 영화들을 찍도록 투자하고 있잖아요. 당시에는 비디오가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박찬욱의 옴니버스 '심판'은 당시 '영화마을'에서 영화마을 비디오 가맹점에게만 독점적으로 배포하는 영화를 만드는 기획에서 출발한 영화였죠. 비디오테이프 황금기 동안 그와 연관된 다양한 문화들이 있어요. 그런 연구들이 나중에는 이뤄져야 하잖아요. 그때 이 비디오테이프는 없으면 안 될 존재겠죠. 그러기 위해서는 이 물성은 반드시 필요하고 기록되어야 하는 것들이죠."


조 디렉터는 '원초적 비디오 본색'을 통해 비디오테이프의 가치와 활용의 가능성, 새 돌파구를 봤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는 무리가 따른다.


"그동안 ACC는 무거운 전시들이 주를 이뤄 일반인들의 전시장 방문이 드물었죠. 그러나 비디오테이프는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잖아요. '원초적 비디오 본색'을 통해 진입장벽이 낮아져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녀갔습니다. 이후 ACC에서 하는 전시들이 다 잘되고 있어요. 이 점을 주목하고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녀간 관객 중 젊은 세대들의 비율이 상당했어요. 사실 '원초적 비디오 본색'의 성공적 종료는 실제 비디오를 빌려봤던 사람들이 아닌, 비디오테이프를 모르던 세대들이 이끌어 냈어요. 보지 못한 걸 경험하면서 문화적인 충격과 신선함을 느낀 거죠. 그들이 전시장을 SNS에 업로드하고, 그 게시물들이 퍼뜨려 나가면서 '원초적 비디오 본색'이 잘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조 디렉터는 비디오테이프가 지닌 가치를 믿고 있다. 고려, 조선시대의 유물이 현재 한 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설명하고 가치를 존중받듯이, 비디오테이프도 언젠가는 한국 영화는 물론, 이 시대의 삶을 녹여낸 물건으로 조명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돈이 되나, 안 되나’로 가치를 판가름하는 세상이 아쉽습니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제가 모은 비디오테이프가 물성의 가치를 증명해 준다는 걸 알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저라도 이 비디오테이프를 껴안고 있는 거죠."


그가 수집한 비디오테이프들은 영상자료원의 영상도서관과 보존고에 있는 2만 7211점보다 두 배 가까이 많다. 개인이 이만큼 수집하고 관리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조 디렉터는 이 여정이 개인의 '힘들고 어려운 여정'이 아닌, 정부나 지자체 등과 함께 만들어가는 '의미 있는 여정'이 되길 바라고 있다.


"이걸 개인이 혼자 붙들고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보관이라도 잘하자는 의견이 지역사회에서 나와주면 좋겠는데 누구도 들어주지 않아 지난한 길을 걷고 셈이죠."


조대영 디렉터에게 '비디오테이프란 인생에서 어떤 존재인가'라고 물으니 "저를 애먹이는 존재"라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지금 비디오테이프를 수집하고 보관하느라 아무것도 못하고 있어요. 비디오테이프 외에도 책도 7만 권 수집 중인데 제 머릿속에는 이걸 더 나은 환경에 갖다 놓으려는 생각뿐이에요. 넓은 공간으로 옮겨내는 것, 이게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기 때문에 다른 일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네요."


그는 언젠간 예술을 넘어 역사적 유물로 기억될 비디오테이프의 가치를 읽어주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까 기다리고 있다. 이 많은 비디오테이프가 그대로 빛을 보지 못한다면 광주의 공공 예술 자산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광주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던 도시로 가장 먼저 떠올리잖아요. 그래서 도시를 무겁고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어요. 이런 광주의 이미지를 상쇄시킬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문화적인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그걸 이 비디오테이프를 중심으로 한 기획으로 승부를 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콘텐츠 공간이 되지 않을까요."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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