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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발진 '의심' 사고와 급발진 '호소' 사고 [박영국의 디스]


입력 2024.08.27 07:00 수정 2024.08.27 09:08        박영국 기자 (24pyk@dailian.co.kr)

급발진 의심사고 소비자가 입증, 현실적으로 무리

입증책임 제조사에게 물리는 법안 발의 잇달아

사고만 나면 '급발진' 주장…소송 남발 부작용 우려

페달 오조작 급발진 억제 장치 의무화 등 '예방적 규제'가 효과적

주차장 건물에 돌진한 SUV(기사 내용과 무관한 참고사진). ⓒ광주 동부소방서

최근 자동차 급발진 의심 사고가 잇달아 발생하며 사고원인 입증책임을 제조사에게 물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에 호응해 22대 국회에서는 제조물 결함으로 인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결함 유무를 제조사가 입증하도록 하는 제조물 책임법 일부개정법률안이 속속 발의되고 있다.


제품 결함과 관련, 다른 제품에 비해 유독 자동차가 민감하게 다뤄지는 것은, ‘결함이 유발하는 피해’가 워낙 치명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휴대폰이나 TV, 냉장고에 결함이 있다 한들 기껏해야 사용자의 불쾌감을 유발하는 정도지 사용자와 주변인의 생명까지 위협하진 못하지만, 자동차는 그게 가능하다.


이미 치명적 사고가 발생했는데, 수천 개의 부품과 각종 첨단 기술이 집약된 자동차의 결함을 밝혀내고, 그 결함이 사고로 이어졌다는 물리적 인과관계를 증명하는 건 일반 소비자에겐 무리한 일이다. 제조사에 입증책임을 물려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서 짚어야 할 점은 자동차라는 제품의 또 다른 특성이다. 바로 ‘조작 실수가 유발하는 피해’ 역시 치명적이라는 점이다. 휴대폰이나 TV, 냉장고를 잘못 조작한다 한들 해당 제품의 고장 외에 재산이나 인명 피해가 크게 발생하진 않지만, 자동차는 페달이나 변속기 오조작이 대형 사고로 이어진다.


‘결함’과 ‘오조작’ 두 가지 가능성이 공존하는 사고에서 거의 무조건 ‘오조작’으로 결론이 나는 지금의 상황도 문제지만, ‘결함’을 대전제로 두고, 그게 아니라는 점을 제조사가 밝히도록 강제하는 것은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80대 운전자가 몰던 승용차 OO로 돌진…급발진 주장'


요즘 신문 사회면에는 이런류의 기사들이 자주 등장한다. 고령 운전자의 조작 실수가 사고로 이어지는 일이 잦지만, 구체적인 조사에 들어가기 전에 운전자가 급발진부터 주장하는 게 일상화돼 있다. 물론 젊은 운전자들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9명의 사망자를 낸 서울 시청역 역주행 참사와 관련해서도 사고차 운전자는 급발진을 주장했지만, 검찰은 차량전자장치(AVN)에 저장된 위치정보·속도와 사고기록장치(EDR), 블랙박스 영상 등을 분석한 끝에 그가 브레이크 대신 가속페달을 밟았음을 확인하고 구속 기소했다.


‘급발진 호소’를 무조건 비도덕적 행위로 볼 수만도 없다. 사고 충격으로 경황이 없을 수도 있고 자기방어기제가 작동할 수도 있다. 어떤 이유가 됐든 비정상적 운행 상황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대다수의 운전자들이 ‘급발진’부터 외치고 보는 게 불편한 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고원인 입증책임을 전적으로 제조사에게 물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소송은 남발될 것이고, 자동차 제조사들은 차를 만드는 것보다 사고가 난 차의 결함 여부를 입증하는 데 더 많은 인력과 비용을 투입해야 될 수도 있다.


모럴해저드는 선의의 피해자를 양산한다. 오조작 사고를 내고 급발진을 주장하며 소송을 거는 수많은 이들은 더 많은 소비자들의 자동차 구매 부담을 늘리는 원흉이 될 수 있다. 극단적으로는 완성차 업체에 주어지는 부담이 임계점을 넘어서면서 부품사까지 포함한 자동차 산업 생태계가 무너질 수도 있다.


불합리함을 개선하고 약자를 보호하는 것은 법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다. 하지만 어떤 법이든 기존 제도를 180도 뒤바꿀 때는 그로 인한 사회적 파장과 부작용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오조작 사고를 낸 ‘급발진 호소인’이 ‘급발진 피해자’로 돌변하는 상황은 기업은 물론, 산업구조 전반, 나아가 개별 소비자에게 모두 악영향을 준다. ‘급발진 호소인’의 악용을 막을 수 있도록 제대로 설계된 법이 아니라면 악법이 될 수밖에 없다.


‘결함’이든 ‘오조작’이든 사고만 나면 닥치는 대로 책임지라고 몰아세울 게 아니라 사고가 나지 않는 차를 만들도록 유도하는 게 법과 규제가 할 일이다.


최근 현대차가 내놓은 소형 전기차 캐스퍼 일렉트릭에 장착된 ‘페달 오조작 안전 보조 기술(PMSA)’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PMSA는 장애물을 감지한 정차 또는 저속 주행 상태에서 가속페달을 빠르고 깊게 밟을 경우 페달 오조작으로 판단해 차량을 제어하는 기술이다.


현대차그룹 내 여러 전기차 중에서도 저렴한 축에 속하는 캐스퍼 일렉트릭에 PMSA를 가장 먼저 적용한 것은, 이 차가 타깃으로 삼은 일본에서 PMSA와 비슷한 PMPD(페달 오조작 급발진 억제 장치) 인정제도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내년 6월부터 모든 신차에 PMPD 설치를 의무화할 계획이다. 법과 규제가 어떤 식으로 국민의 안전을 보장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박영국 기자 (24py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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