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테말라로, 세인트키츠 네비스로…'세금 유목민' 생활
국내선 비거주자인 것처럼 납세 회피…"전세계 어디에서도 세금 안내"
국내서 소득 올렸으면 정직하게 세금 납부하는 게 상식
'세인트키츠 네비스가 어디에 붙어 있는 나라야?'
5일 고(故) 구본무 LG그룹 선대회장의 맏사위 윤관 블루런벤처스(BRV) 대표가 강남세무서장을 상대로 낸 '종합소득세 부과처분 취소청구' 소송의 5차 변론이 끝난 뒤 나온 의문이다.
이날 재판에서 강남세무서 측 변호인인 법무법인 가온의 강남규 대표 변호사는 윤 대표가 전 세계 어디에서도 세금을 내지 않는 세금 유목민(택스 노마드)처럼 국적을 바꾸고 있다며 "조세피난처인 세인트키츠 네비스의 국적을 취득하려 했었다는 기록도 있다"고 주장했다.
검색 포털에서 찾아본 세인트키츠 네비스의 정보는 이렇다.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이자 미니국가이다. 총면적은 서울의 절반이고, 인구는 5만4129명(2022년 추정)."
"다른 카리브해 혹은 중남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투자이민이라는 이름으로 나라에서 자체적으로 국적 장사를 한다. 의무체류는 물론이고 입국할 필요조차 없이 그냥 3억원 정도의 돈만 내면 국적을 부여."
"영국, 유럽을 비롯한 130여개국의 국가와 무비자 협정을 맺은 터라 이 나라의 국적만 가지고 다른 나라에 살면 되기 때문에 돈만 많으면 생활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 때문에 세계 숨은 재력가들이 국적을 세인트키츠 네비스로 옮기고 있다는 뉴스도 있었다.
윤 대표 덕에 알게 된 사실은 이뿐 아니다. 과거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처가 쪽 한 인사가 자녀를 외국인 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온두라스 위조 여권으로 국적을 속이려 했다가 처벌된 적 있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윤 대표 재판에 등장했던 바로 그 세인트키츠 네비스로 국적을 바꿔버렸다고 한다.
온두라스와 과테말라의 차이를 빼면 윤 대표의 재판과 겹치며 묘한 기시감을 만들어낸다. 실제 윤 대표는 과테말라 위조 여권을 만들어 이를 기반으로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렇게 보면 예나 지금이나 탈세나 편법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어떻게 하면 아들·딸에게 재산을 물려줄지를 놓고 머리를 싸매는 사회지도층의 모습은 한편의 블랙 코미디다.
실제 조세회피처를 이용하는 사회지도층에 대한 추측과 소문은 많았으나 재판을 통해 그 실체가 적나라하게 알려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런 걸 고맙다고 해야 할까.
내야 할 세금을 법을 어기면서 내지 않는 것은 탈세(脫稅)다. 이 세상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은 '죽음'과 '세금'뿐이라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처럼 소득 있는 곳에는 예외 없이 세금이 부과돼야 한다. 무엇보다 윤 대표가 한국에서 사업을 했다면 거기서 올린 수익은 한국에서 세금을 내는 것이 맞다.
강남세무서 측은 "국세청에서 비율로 뽑아봤더니 자금 출처는 거의 100% 한국에서 나왔고 투자처의 80% 정도가 한국"이라며 "미국 일을 했다고 하지만 사업 활동에 투자한 시간을 뽑아봐도 95%가 한국"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한국에서는 자신이 미국인이라고 주장하고 정작 미국에서는 세무신고에서의 국적을 '일본'으로 적시하기도 했다.
신분 세탁을 해서 국내 복지와 편의만 누리고 그 어느 곳에서도 세금을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머리를 싸매지 말고 세금을 정직하게 납부할 때도 되지 않았을까. 가진 자와 사회지도층이 썩었는데 국민에게 공정과 상식을 외쳐본들 먹혀들 리 없다. 특히 이런 일이 반복되는 한 조세 정의는 요원하다.
쥐꼬리만 한 급여에 세금을 꼬박꼬박 내면서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일반서민들에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한다. 탈세는 곧 사회적 매장이란 인식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
끝으로 사족. LG그룹의 경영권이 윤 대표의 부인이자 고 구 회장의 장녀인 구연경 LG복지재단 대표에게 갔으면 어땠을까. 윤 대표가 구 대표를 통해 그룹을 움직였으면 도덕과 윤리로 무장한 LG의 정도경영이 가능했을까.
이미 검찰은 남편인 윤 대표를 통해 미공개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주식거래를 한 혐의로 구 대표의 자본시장법 위반 여부를 들여다보고 있다. 과연 이 사안은 이 둘에만 한정되는 특별한 것일까.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그래도 상상해 본다. 끔찍한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