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피해자 보증 취소한 HUG
임차인만 피해 보는 약관 손질된다
190억 가로챈 임대인…15년형 선고
공정위 “HUG 이행 여부 점검할 계획”
그에게도 꿈은 있었다. 지난 2021년 7월께 부산에 자취방을 마련한 A씨는 2년 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서 보증보험을 받아 본인의 거주 중인 곳에서 재계약을 진행했다. 확정일자까지 받고 대출 연장까지 해놓은 A씨는 본래의 전세 가격보다 1500만원 낮게 재계약을 했다. 그러나 감액된 금액을 돌려받기 하루 전날 임대인의 전화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최초 전세 계약 금액은 1억4500만원이었다. 그는 “1500만원을 돌려주지 못하겠다며 통보식으로 말을 해서 ‘전세 사기’라고 인지했다”며 “보증서가 있었기 때문에 지체 없이 HUG에 전화를 했지만 보증 취소가 됐다”고 설명했다. 카카오톡으로 보낸 공문 형식의 메시지가 전부였고 처음에는 취소한 이유조차 설명이 없었다고 했다.
A씨는 지난 4일 전세 사기 전후의 과정을 설명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는 “이 집에서 전세로 살다가 돈을 모아서 나갈 생각이었죠. 계획은 다 무너졌고 억울합니다. 하루하루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전세 피해당한 집에서 계속 살고 있는 거죠”라며 “지옥같이 살고 있는 세입자들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보증금을 받고 앞으로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피해자는 A씨 말고도 많았다. 1명의 임대인이 이른바 ‘무자본 갭투자’를 통해 주택 190가구를 매입한 뒤 150여명으로부터 전세보증금 190여억원으로 가로챘다. A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이 중 보증 취소가 된 99세대 일부 피해자는 HUG와 전세보증급 지급 청구 소송을 진행 중이다. 결국 200억원에 육박하는 보증금을 가로채 전세 사기를 저지른 혐의로 기소된 임대인은 1심에서 법정 최고형인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HUG 보증 취소 조항…공정위, 약관 시정 권고
잘못이 없는 전세 사기 피해자를 두 번 울릴 수 있었던 데에는 HUG의 개인임대사업자 임대보증금 보증 약관에 포함된 보증 취소 조항 때문이었다. 민간임대주택 임대인이 사기·허위로 임대차 계약을 체결했거나 이를 근거로 보증을 신청한 경우, 집을 빌린 사람의 귀책 사유가 없음에도 HUG가 일방적으로 보증을 취소할 수 있는 조항이다.
민간임대주택 임대인은 이 보증에 의무 가입해야 한다. 계약 종료 후 임대인이 임대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면 HUG가 임차인에게 대신 돌려주는 구조다. 전세 사기에 대비한 보증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실제 사기를 당했음에도 보증받지 못하는 사례가 발생하는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이같은 HUG의 ‘개인임대사업자 임대보증금 보증 약관’을 심사한 결과 보증 취소 관련 조항을 수정·삭제하도록 권고했다고 5일 밝혔다. 시정권고 기한은 60일이다. 이 안에 권고를 따르지 않으면 시정명령에 고발까지 당할 수 있다.
피해자들 신고로 조사에 나선 공정위는 임대인의 잘못으로 보증이 취소되는 것은 고객에게 부당하게 불리한 조항으로 약관법에 위배된다고 판단했다. 보험계약자의 사기,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있더라도 피보험자에게 책임 사유가 없다면 보험금을 지급하도록 한 상법 규정 취지에도 반한다고 공정위는 설명했다.
즉, 위험만 고객에게 떠넘기고 사업자에게 법률상 부여되지 않는 해지권을 부여하는 부당한 조항이라는 뜻이다. 특히 이 조항은 국민 주거 안정이라는 민간임대주택 제도의 목적에도 맞지 않고, 보증계약에 따른 보증금을 반환받을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권리도 제한한다고 덧붙였다.
공정위는 개인임대사업자의 보증뿐만 아니라 HUG의 법인임대사업자, 개인 간 임대를 대상으로 한 보증 상품 약관에도 유사한 조항이 있음을 확인하고 수정하도록 협의할 방침이다.
아울러 HUG가 권고에 따라 이 조항을 시정하면, 상품 가입 전세사기 피해자가 임대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일은 막을 수 있을 것으로 공정위는 기대했다. 다만 이미 체결된 계약 관계를 되돌려 무효로 할 수는 없다.
신용호 공정위 약관특수거래과장은 “시정권고 이후 HUG와 해당 약관조항에 대한 시정 협의를 진행하고, 이행 여부를 점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편, 국토교통부 전세사기피해지원위원회에서 전세사기피해자등으로 인정된 건수는 지난달 25일 기준 2만3730건에 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