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공방이 덮은 민생·경제 어쩌나
헌정 사상 준예산 단 한 차례도 없어
탄핵 정국에 경제정책방향 표류 중
비상계엄 후폭풍과 야권의 탄핵 추진으로 정국 혼란이 가중되면서 내년 예산과 경제정책방향, 민생법안 처리가 끝 모를 불확실성에 빠졌다.
헌정 사상 초유의 ‘준예산’ 사태까지 현실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며 반도체 특별법, 상속세제 개편안 등 주요 경제 법안이 좌초될 위기에 빠졌다.
특히 민생 회복을 위한 정책 대응이 중요한 시점에서 기획재정부를 비롯해 경제 컨트롤타워가 제대로 된 역할 수행에 차질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혼란 속 대책 회의…한숨 커진 경제팀
9일 관계부처 등에 따르면 기재부와 산업통상자원부 등은 오는 11일 한화오션 연구·개발(R&D) 센터에서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 주재 ‘산업 경쟁력 강화 관계장관회의’를 예정대로 개최할 예정이다.
앞서 정부는 미국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산업경쟁력 강화’를 위한 범부처 논의를 지난달 27일 가졌다.
산업경쟁력강화 관계장관회의를 기존 기업 구조조정 외에 산업 체질 개선 방안까지 논의하는 회의체로 확대 개편한 것이다.
차관 주재로 기존 기업구조조정 분과에 더해 총괄 분과와 기술분과, 산업분과, 혁신분과, 기반시설 분과를 추가 운영한다.
그러나 정치적 마비 상태에 회의에서 나오는 대책들에 힘이 실리긴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용인·평택 반도체 클러스터의 송전선로를 땅에 묻는 ‘지중화 작업’ 비용 분담과 반도체 기업 세제 혜택 확대 등 반도체 관련 법 처리는 ‘탄핵 정국’에 맞물려 기약이 없어질 위기에 놓였다.
또 반도체 기업에 한해 주 52시간 근무를 예외하고 보조금을 지원하는 ‘반도체산업의 경쟁력 강화 및 혁신성장을 위한 특별법(반도체특별법)’ 등도 여야 간 합의 처리를 기대하기는 어려워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반도체 기업의 통합 투자세액 공제율을 현행보다 5%p(포인트) 높여 국가전략기술 투자세액공제 대상에 연구·개발(R&D) 시설 투자를 포함하는 정부 지원책도 뒷전으로 밀릴 가능성이 높다.
비상 계엄 후폭풍 속에서 정부 간 계약 성격이 강한 체코 신규 원전 수출에도 일정 부분 영향이 불가피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동해 심해 가스전 시추사업(대왕고래 프로젝트) 등 주요 사업들도 난관에 부딪힌 모양새다.
경제팀 수장인 최 부총리와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모두 ‘밸류업’을 위한 정부 조치를 차질 없이 진행하겠다고 강조했지만, 정작 입법이 필요한 핵심 과제들은 미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부가 추진해 온 각종 세법개정안도 틀어막혔다.
야당이 강하게 반대하고 있는 최고세율 인하 등 내용을 담은 상속세제 개편안, 정산 주기 단축을 골자로 하는 대규모유통업법 개정안,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납입 한도 상향 등 내용을 담은 조세특례법 개정안 등 법안들도 안갯속이다.
표류 중인 금융투자소득세와 가상자산 과세 모두 소득세법 개정안이 연내 통과되지 않을 경우 당장 내년 1월 1일부터 시행된다.
다만 일부 여·야 합의가 이뤄진 민생 법안들은 탄핵 대치 상황과 별개로 연내 처리될 가능성이 있다.
‘준예산’ 시계 째깍…완만한 합의 미지수
당장 사상 초유의 ‘준예산’ 집행 사태가 현실화할 가능성도 높아졌다.
탄핵 정국 속 여야 극한 대치가 이어지면서 내년도 예산안도 막판까지 험로가 예상된다.
앞서 더불어민주당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 없이 예산안 합의는 없다”며 총 4조1000억원을 삭감한 기존 감액안에서 7000억원을 추가로 깎은 ‘수정 감액안’을 상정·처리하겠다는 방침을 내놨다.
최 부총리는 이날 오후 국회에서 우원식 국회의장을 만나 “대외신인도 유지와 경제안정을 위해 여야 합의에 의한 예산안의 조속한 확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의장님께서 여야협상의 물꼬를 큰 리더십으로 터달라고 요청드렸다”고 밝혔다.
하지만 우 의장이 10일까지 여야 합의안을 마련해 오라며 감액 예산안 상정을 보류한 가운데 지난 3일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여야 협상은 완전히 멈춰선 상황이다.
윤 대통령이 12·3 비상계엄 사태에 ‘야당의 예산 폭거’를 이유로 내세우면서 향후 여야가 원만한 합의를 이뤄낼지는 미지수다.
일각에서는 준예산 편성 가능성도 거론된다. 준예산은 직전 회계연도 마지막 날인 12월 31일까지 예산안이 처리되지 못할 경우 최소한의 정부 기능 유지를 위해 전년도에 준해 편성하는 예산이다.
헌정사상 준예산이 편성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어 재정당국은 물론 전반적 혼란이 불가피하다.
준예산이 편성되면 공무원 인건비, 국고채 이자, 국민연금, 아동수당, 생계급여 등 기본적인 예산 집행만 가능하다.
상당수 복지 재원 지출이나 재량 지출 등은 집행 제한이 불가피해진다.
정부가 준예산 시나리오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탄핵 정국이 길어진다면 그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내년도 경제정책방향 ‘안갯속’
정부가 당장 이달 중 발표하기로 한 내년도 경제정책방향부터 차질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지난 2016년 말 탄핵 정국에서의 2017년도 경방처럼 리스크 관리에 급급한 ‘반쪽짜리’에 그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당시도 미국 트럼프 1기 집권, 극심한 내수 침체 등 난제가 많았다.
경방에는 고용·물가·경상수지 등 거시경제 전망을 비롯해 한 해 동안 정부가 추진할 경제정책이 모두 담긴다.
한편 기재부는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확대간부회의를 열고 2025년도 경제정책방향, 산업별 경쟁력 강화 방안 등 각 실국별 연말·연시 업무 추진 현황을 점검했다.
기재부 관계자는 “내년도 경제정책방향에 대한 논의는 계속 진행 중”이라며 “민생·경제 현안 해결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밝혔다.